조연이 세상을 사는 법
예전에 썼던 포스트의 재활용입니다 ^^;

마침 이글루스의 금주의 테마가 좋아하는 캐릭터이길래 뭔가 남기고 싶었는데, 지금 당장 생각을 정리하기도 뭐하고 전에 이런 글을 썼던 것이 생각나서 다시 표면으로 올려봤습니다. 츄츄 블로그이긴 하지만 어째 미츠키와 우테나가 아히루를 띄워주기 위한 들러리로 전락한 것 같아 미안하기 짝이 없네요. 두 사람, 내 맘은 그게 아니예요. 내 맘 알지? <- ;;;




제 안에 있는 아히루란 존재는...

요 전의 포스트를 쓰다가, 제가 좋아하는 세 작품 - 그러니까 [소녀혁명 우테나], [프린세스 츄츄], [풀문을 찾아서] 이 세 이야기의 주인공들에 대한 애정의 차이가 어디서 기인하는지 궁금해지더군요. 좋아하는 마음은 똑같거든요.




[풀문을 찾아서] : 코우야마 미츠키


먼저 사랑하는 미츠키쨩부터.
미츠키는 무슨 소리를 들어도 '납득이 가기 때문에' 넘길 수 있다고 했는데요. 말 그대로입니다. 미츠키는 대단한 아이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행운아입니다. 결정적으로 클래이맥스에서, 미츠키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은 치명적입니다. 그녀의 운명은 타쿠토와 메로코의 선의에서 베풀어진 희생으로 인해 구원받았거든요. 그러니 미츠키가 뻔뻔하다고 뭐라 말 들을 만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미츠키를 좋아합니다. 안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 주위에 타쿠토나 메로코 같은 멋진 사람들이 있어준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말입니다. 미츠키는 운명에 저항할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두 사람은 그에 응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의지를 가지지 못했을 때조차 제 주위의 사람들은 저를 떠나지 않았지요.
저는 미츠키에게 뭐라고 할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게 그 의지를 전해준 미츠키를 너무나도 좋아합니다.



[소녀혁명 우테나] : 텐죠 우테나


우테나는 그야말로 이상적인 인간입니다. 자신 안의 여성성을 포기하지도 않고 남성성에 휩쓸리지도 않은 채 스스로의 정체성을 발견해 그것을 딛고 일어선 캐릭터지요. 강하고, 아름답고, 여튼 너무너무 멋집니다. 우테나가 그렇게 사라졌어도, 그녀는 아히루와 달리 연민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우테나는, 그리고 안시는 세계를 혁명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은 것이니까요. 좋아하는 마음은 마찬가지이지만, '동경'이랄까요. 그녀에게 감정 이입을 하기엔 제가 너무도 부족합니다. 끝없이 그녀의 뒤를 쫓고 싶을 뿐이지요. 그래서 우테나에 대해서는, 혹시 험담을 듣더라도 '어이가 없어서' 귓등으로도 안 들린다는 겁니다.




[프린세스 츄츄] : 아히루


그런데 왜 아히루만은 내버려둘 수 없는 걸까요.
아히루는 앞서 언급한 누구보다도 보통사람의 대변자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조연이라는 운명에 휩쓸려 떠돌 수밖에 없는... 그런 컴플렉스지요. 앞서 아히루가 자기긍정을 보여주었다고 적었습니다만, '현실의 나는 오리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말은 자기긍정인 동시에 체념이기도 합니다. 현실은 원래 그런거야, 라고 받아들이는 거지요. 그 말 속에는 어찌할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습니다. 어릴 때는 공주님인 줄 알았지만 커보면 평범한 일반인. 현실은 원래 그런 것임에도 불구하고, 슬픈 이야기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좌절감을 알고 있습니다. 세상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때의 아픔을요.

아히루가 현실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것은 도의적이고 올바른 결단이기는 하나, 사회적인 문제를 빼고 개인만 놓고 봤을 때도 그럴까요. 아히루 자신만을 위해서도 그게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히루가 언제 '인간보다는 오히려 오리인 편이 더 나아'라고 했습니까? 계속 꿈만 꾸고 있는데 그게 어떻다는 겁니까? 적어도 그러면 오리일 때보다 더 많은 것을 해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들이야 어찌 되든 무슨 상관입니까. 모 애니에서는 삽질 주인공의 자아를 갱생시키기 위해 축하해요 한 마디에 지구 전체를 뽀개먹기도 했는데요.

클래이맥스가 닥쳐온 순간 아히루에게는 사실상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너무도 착했던 그녀는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지요. 그것을 포옹한 아히루의 변화도 성장이기는 하나, 자신의 자아를 완성시켜 학원을 떠난 우테나(안시)의 파격적인 혁명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우테나와 안시는 '왕자냐 공주냐'라는 선택을 강요하는 세계에서 제 3의 선택을 내리고 알로부터 뛰쳐나왔으니까요. 그래서 우테나의 엔딩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하게 빛나는 거구요.

그러나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거겠습니까.

현실 속에서 선택의 순간과 맞닥뜨릴 때마다, 우리는 수많은 좌절을 겪습니다. 어떤 것은 버려야 하고, 어떤 것은 잊어야 합니다. 우테나처럼 제 3의 길을 찾아서 나갈 수도, 미츠키처럼 누군가가 구원해주기를 기대할 수도 없는 자신. 그 순간마다, 가장 가혹한 현실 - 너는 오리다 - 을 받아들여야 했던 아히루가 떠오르기에, 그녀를 연민하는 것은 결국 자기연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렇잖아도 안된 아히루를 향한 험담은 참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미 충분히 버리고 희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도 잊혀져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건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남의 일이 아니기에... 아히루의 마지막 모습은 빛으로서, 그리고 시퍼런 칼날로서 심장 속에 박혀 있는 겁니다.

그리고 자처해서 악역을 맡아준 화키아에게 괜히 심통을 부리는 거겠지요(웃음). 미안, 화키아. 아직 내가 살아갈 현실은 길고 험해. 그동안, 바른 소리만 해주는 너에게 조금만 더 짜증을 내도 될까?


Special Thanks to 부재자
2005년 5월 12일 23시 10분


by 살아가자 | 2005/11/26 23:50 | 화키아의 불타라 펜 | 트랙백 | 덧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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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不在子 at 2005/05/12 23:43
티앙팡 대화에서 건진 것들이냐 훗
자주가야겠네 그 까페 - 얼그레이 맛있었지.
미츠키가 동화라면, 우테나는 이상, 아히루는 현실이라고 할수 있지. (무려 평민인게냐 아히루!) 개인적으로는 우테나 만세!이긴하다만, 공감을 형성하기엔 아히루가 더 가깝겠지.
Commented by 시니키 at 2005/05/13 01:12
우와, 세 여주인공에 대해서 정말 가장 정확한 분석을 내려주셨군요. 늘 느끼는 거지만, 살아가자 님의 분석력과 표현력은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ㅁ;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5/05/13 21:28
부재자 / 맘에 들었다니 기쁘다. 청룡님께 소개받은 카페지 ^^;; 다음에 또 가자!
시니키님 / 그렇지 않아요 ^^; 그냥 제 마음 속에서의 차이를 비교해서 정리해본 것뿐이니까요.
Commented by zero at 2005/11/26 23:56
아히루...츄츄 마지막화 전쯤에서 아히루때문에 정말 어째서 이런!!!하고 비명을 질렀습니다;ㅁ; 아히루으~!!!!!!!!!!!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5/11/27 16:02
저도 그렇습니다 ㅠㅠ 그 눈물이 맺혀가던 표정이 잊혀지질 않아요.
Commented by 검은고양이 at 2005/11/27 20:04
츄츄 마지막 편을 보고 미쳐버린 저는.. 후훗; 애들한테 보라고 권했지만 애들은 강요로 밖에 생각 안하더군요. "그림체가 이상해." "내 취향이 아니야." "'아히루'라는 애의 성격이 맘에 안 들어" 라는 말을 들을 때 마다 가슴이 찢어집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아요. 아히루는 나에게 커다란 것을 가르쳐줬기에 그 커다란 것을 남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훗 여기까지는 저 위의 포스팅 되어있는 글의 답글입니다..]
아히루는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아이지요ㅠㅠ 저 25편에서 아히화키의 파두되에서 아히루가 말할때는 가슴이 찢어질 듯 했던.. 아히루! 욕심부려도 돼! 된다구! ㅠㅠ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5/11/27 22:29
떠올리면 괴롭습니다 으윽.. 저로서는 정말이지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제 주위의 분들은 이제 츄츄를 거의 다 본 편이라 ^^; 근데 제 반응을 지켜보자니 무서워서 안 보시겠다는 분들도 좀 되시더군요. 히잉 왜애(...)
Commented by 헤니히 at 2005/11/28 17:25
나도 내 반응때문에 무서워서 안보려는 사람이 꽤 있더라고.
그럴때마다 혹시 저 사람들 츄츄 볼 수 있는 잠재적시청자인데 설마 나때문에?
란 생각이 들어서 허무할때도 ....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5/11/28 22:11
응 그럴 땐 좀 괴롭고 아프지(.....)
그렇다고 이제 와서 티를 안 내기에도 한참 늦었잖아. 내 일반인 친구들이 죄다 알고 있을 정도인걸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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