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소년격투만화에서 가장 전형적인 이야기 패턴이라고 한다면 역시 ‘나쁜 일당이 쳐들어와서 걔네들과 싸우는 것’이다. 주인공이 그 수하들을 해치우고, 중간 보스를 쓰러뜨리고, 라스트 보스까지 무릎 꿇리면 이긴다. 그 와중에 주인공은 점점 세지고, 동료들과 교류하면서 정신적으로도 성장한다.
똑같은 이야기 패턴을 도대체 얼마나 울궈먹을 작정인지. 어디선가 본 듯한 상황, 어디선가 본 듯한 캐릭터, 어디선가 본 듯한 전개에 색만 약간 다르게 입힌 최근의 만화들은, 소년만화를 그렇게까지 많이 보지 않은 나도 신물이 날 지경이다.
겉으로는 별 거 아닌 것처럼, 다른 소년만화들과 별다른 게 없어 보일지 몰라도 기본 설정을 잘 뜯어보면 정말 오랫동안 고심해서 만든 티가 난다.
배경 설정의 참신함일단 사건 발단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100명의 마물 아이들이 각자의 책과 함께 인간계로 보내져서, 책주인으로 선택된 인간과 2인조 팀을 짜서 서로 전투를 벌인다. 상대의 책을 태우면 상대는 마계로 강제송환되고 이 싸움에 참가할 자격도 잃게 된다. 마물 아이들은 최후의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싸우며, 마지막에 남은 한 명이 차기 마계의 왕이 된다.>

[금색의 갓슈]는 바로 이 점에서부터 타 소년만화와 차이가 난다. 이들이 싸우게 되는 이유는 ‘세상의 평화를 어지럽히는 악당의 저지’가 아니라, ‘마계의 왕이 되기 위해서’, 좀 다르게 표현하면 ‘마계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이다. 배경 설정이 삼국지나 초한지와 같은 군웅물(群雄物)의 성격을 띄고 있는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경우의 수가 훨씬 많아진다. 악당과의 싸움이라면, 우리 편과 적 편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밖에 적용할 수 없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정치적인 문제일 경우, 소위 ‘파벌’이라는 것이 생겨나기 때문에 이야기를 훨씬 풍성하게, 또 의외의 국면으로 전개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야깃거리만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다. 캐릭터 또한 다양해진다. 가령 셰리와 팀을 짜고 있는 브라고나, 바리와 같은 경우는 패왕(覇王)의 이미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브라고에 비하면 바리가 너무 애송이지만). 반면 붉은 책의 아이 갓슈는 보시다시피, 덕의 힘으로 사람을 모으는 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웡레이의 경우 수호왕을 목표로 하며, 어쩐지 삼국지의 동탁을 연상시키는 찌질이 조피스 등, 각자 왕이 되려는 꿈을 위해 자신만의 어떤 이미지를 목표로 하면서 성장하게 된다. 꿈이 확고한 후보자들은 각자의 매력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한 명만 응원하기가 참 난처하다. 마치 홍천녀를 따내려는 마야와 아유미 중 한 명만 응원하기가 곤란한 것처럼 말이다(뭐냐 그건...).
전하는 메시지의 능동성이것 역시 소년만화로서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충족시키는 요인이다. 설정만 놓고 단순 비교했을 경우 ‘자신의 꿈을 위해 참전’이라는 동기에 비해, ‘쳐들어온 적을 저지’라는 동기는 덜 진취적일 수밖에 없다. 내부적 요인이 동기가 되는 전자의 경우 ‘목표로 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자신 스스로 나아가려 하는 것’이지만, 외부적 요인이 동기가 된 후자는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기 위해, 혹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양쪽 다 소중한 것이며, 결국은 이야기 전개하기 나름이다. 한데 요새는 천편일률적으로 이바쇼居場所(자신이 있을 곳, 일상), 현재의 상태유지라는 것에 집착하고 있어서 지겹다)
흔히 써먹는 발단, 어느 날 엄청 쎈 악당이 나타나서 평화를 위협한다거나 누군가를 납치해갔다거나 하는 상황은 굳이 분류하자면 ‘일상이 침범당하는 공포’인 셈인데, 말하자면 이건 일종의 재해이고 사고다. 평화를, 일상을 되찾기 위해 싸운다고 하지만, 정작 독자는 그 ‘비일상적인 모험’을 즐기고 있다.
꿈을 위해 싸워야 하는 상황이 더 절박하게 와닿는다고 한다면, 그건 아마도 집이 태풍으로 쓰러진다거나 화재로 타버린다거나 도둑이 들었다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신다거나 하는 ‘일상의 위협’보다는, 입시가 좌절되거나 면접에서 탈락하거나 시험에서 떨어지거나 하는 ‘목표의 좌절’이라는 두려움을 평소에 더 많이 의식하고 살기 때문일 것이다. 항상 곁에 있어 따분하다고 느껴지는 일상과 달리, 언제나 알 수 없는 미래는 항상 불안하다. 게다가 ‘어쩔 수 없었던’ 재해가 아니다. 스스로 선택해서 주어진 것이기에 탓할 것은 자신뿐이다. 이카루스의 날개가 꺾일 때 더 아픈 것처럼.
그렇기에 보통 소년만화에서는, 무작정 싸우기만 하는 소년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어떤 ‘목표’나 ‘꿈’을 부여하려 한다. 계속 이겨나가면 성립되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나, 혹은 추상적인 가치, ‘신의 한 수’라든가, ‘진정한 듀얼리스트’ 등이다.
갓슈의 꿈은 ‘어진 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전자의 경우처럼, 그냥 이기기만 한다고 이룰 수 있는 꿈이 아니라는 점에서 레벨이 더 높다. 그렇다고 후자와 같은 추상적인 가치의 획득도 아니다. ‘신의 한 수’나 ‘진정한 듀얼리스트’와 같은 내적 성장과 달리, 어쨌거나 왕은 단 한 사람밖에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진 왕’이라는 목표는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도 않고 정치적인데다(자신만을 위해서 성취하는 꿈이 아니라 모두를 이롭게 하기 위한 이상이니) 어렵다. 언젠가 친구들과도 한 번씩은 대결해야 하는 운명이니까.
인간관계 설정의 독창성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미 말했다시피, 마물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동시키기 위해 반드시 인간 파트너와 콤비를 짜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운용할 수 있는 캐릭터가 두 배로 늘어날 뿐만 아니라, 커플링의 조합을 이용해 서로의 사연까지 써먹을 수 있기 때문에 이야깃거리가 정말 무한대로 나오게 된다. 또한 혼자서라면 할 수 없던 것도 파트너가 충족시켜주기 때문에, 아무리 약한 마물이었더라도 역전의 기회가 생긴다(그 대표적인 예가 적본콤비).

마물과 책주인은 자연스럽게 운명공동체의 성격을 띠게 되고, 서로의 인연은 절대로 끊을 수 없는 필연이 된다. 전우로서 대등한 관계를 성립할 뿐만 아니라, 타인과 호흡을 맞춰야 하기에 ‘나’가 아닌 ‘우리’라는 메시지도 고스란히 들어간다. 이 만화의 여성 캐릭터들이 유난히 인기가 많고 형님(....)이라고 지칭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여기서 기인하지 않나 추측한다. 기본적으로는 단 둘이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에 그만큼 한 사람에게 지워지는 책임의 무게가 막중하고, 따라서 어리광 따위 부리고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덕분에 여자애들이 엄청 털털한데다 터프하고 의리도 있다.
전혀 다른 캐릭터들이 콤비로 짜인 채 서로 교류하면서 변화되고, 경우와 필요에 따라서 다른 콤비들과 힘을 합치기도 하고 대결하기도 하면서 나아가는 과정은 절로 가슴을 뛰게 한다.
전투방식의 우수성「죠죠의 기묘한 모험 ~ 3부 스타더스트 크루세이더즈」(1989) 이래, 파워만으로 대결하던 소년만화는 ‘능력자’ 패턴을 도입하게 된다. 힘과 맷집만으로 승패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다른 능력을 활용하여 보다 다양하고 재기넘치는 전투를 선보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기냥 세지기만 하면 장땡인’ 파워 에스컬레이터식 전개에서 어느 정도 탈피할 수가 있게 되었다. 최근에도 인기인 [원피스]나 [헌터헌터]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겠다.
[금색의 갓슈]는 그러한, 소위 ‘능력자 만화’ 중에서 가장 발전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능력자 설정을 차용하고 있는 작품은, 어떤 형태의 능력이든 결국은 타격용으로 쓰는 결과가 나온다. 체스처럼 각 말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것이 바로 ‘능력자 컨셉’의 가장 큰 장점인데, 전원의 서로 다른 능력이 똑같이 타격용이면 전투 자체는 화려해질지 몰라도 전략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다. 각자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경우의 수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나 역시 그런 전개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실은 칸쵸메를 처음 보았을 때 쟤는 도대체 어디다 써먹나 싶었다. 아마 칸쵸메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무기력한 캐릭터로서 개그 전담으로 누락되거나, 아니면 갑자기 전투능력 쪽으로 세지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천년마물편에서 그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전투용 능력이 아니라도, 혹은 치유력이 아니라도, 싸움엔 도움이 안 될 듯한 능력이라도 그 자신에게 용기만 있다면 충분히 쓸모가 있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커다란 휴머니즘이고 희망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방어전문인 티오에게 부여해준 주술, 기가 라 세우실은 캐릭터의 특성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전투에서 쓸모있는 기술이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싸우는 내용이 주인 이상 공격술은 더욱 다양해서, 육체강화술, 원거리 공격술, 특정원소 이용술 등등 기존에 있었던 기술의 가지가지가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작가의 계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장기간 연재하는 만화가 처할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도입한 설정, 그것은 마물들이 자신의 잠재능력을 깨닫거나 새로운 결의를 할 때마다 그에 걸맞는 새로운 주술이 부여된다는 사실이다. [성장한다]는 테마를 정신적으로도, 비쥬얼적으로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얼핏 보면 기존 만화에도 나오던 설정 같아 보이지만,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 그냥 무작정 공격력이 세지는 필살기 파워업이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기존 주술과 함께 활용해서 쓸 수 있는 기술 및 전략적인 면을 고려해서 파워의 밸런스를 맞춰주고 있다. 그렇게 성장해가면서 전투 방법은 날로 다양해져가고, 별 상관없어 보이던 키요마로의 천재 설정도 빛을 발한다. 이 녀석, 확실히 천재가 맞다. 아니면 그렇게 즉석에서 다양한 전략을 구사할 수 있을 리가 없다구. [말아톤]을 본 사람들은 수학문제 잘 푸는 것만이 천재의 증거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키요마로는 수학문제도 잘 풀지만 말이다 ^^;)
스토리 전개의 무한성현 일본의 잡지연재 시스템 내에서, 모든 만화는 ‘인기가 있어서 질질 끈다’ 혹은 ‘잘린다’는 숙명을 벗어날 수 없다. 아무래도 길어지다 보면 이야깃거리가 떨어지게 되고, 그러면 일반적으로 외부적 요인을 집어넣어 - 새로운 적을 만든다든가 - 비슷비슷한 패턴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게 된다. 하지만 관성적으로 계속 보게는 될지 몰라도, 작품의 전체적인 질이 떨어지는 것은 필연적인 결과다. ‘딱 거기에서 끝냈으면 좋았을 걸.’ 한 때 인기 있었던 소년만화 중에 이 소리를 안 듣는 작품이 도대체 몇 개나 있으려나.
[금색의 갓슈]의 작가, 라이쿠 마코토는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물 100명이라는 숫자는 정말 절묘한 컨트롤이다. 반드시 콤비여야 하니까 이야기 내의 캐릭터 운용은 200명까지도 가능한 주제에, 탈락은 둘이서 함께 하게 되니 여차하면 상대할 숫자를 파바박 줄여 끝낼 수도 있는 것이다. 또한 전투 방식이 배틀 로얄이니만큼, 후반부로 가면 점점 더 강한 상대가 나오는 게 필연적인 전개가 된다. 이건 수하들만 득시글 보내고 뒤에서 앉아 기다리는 라스트 보스의 개념과는 전혀 다르다.
그리고 이제 인기도 생겨 연재도 탄력을 받은 지금, 도대체 어느 시점에서 이야기를 끝낼 지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제온의 정체조차 미궁 속에 있는 지금 배틀 로얄 자체도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배틀 로얄이 끝난다고 이야기가 종료될까? 천만에! 난 반드시 마계편이 있으리라 확신한다(이 무슨 [유유백서] 같은 이야기인가 싶긴 하지만...). 아마 레인이 기권하는 시점에서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갓슈의 꿈은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진 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갓슈라면 분명 어진 왕이 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긴 하지만, 이건 절대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마계 왕위를 계승한다고 해서 끝날 리가 없다. 현재의 마계왕이 뉘신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분명히 코루루를 비롯해 몇몇 마물들의 사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어쩌면 마계의 대대적인 정치와 사회 개혁까지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과정 역시 순탄할 리가 없고.
왕을 정하는 방식이 배틀 로얄이라고 해서 처음엔 깔봤었는데, 이게 의외로 왕으로서의 자질을 시험하기에 적합한 형태라 놀라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관없는 사람들이나 의욕없는 마물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확실히 문제다. (모 분 말씀따나, 지네들끼리 왕 정하는 건 좋은데 지형 바꾸지 말란 말이다. 구글 어스 업데이트도 느린데...) 갓슈가 돌아가서 이 문제 제기를 안 할 리가 없다. 그에 따른 파문이 안 일어날 리도 없고. 천년 전에도 싸움이 있었다는 것은, 이 시스템은 현재의 왕이 정한 것이 아니라 전통이라는 증거다.

그러면, 그냥 동인계의 농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키요마로가 마계에 가야 할 거다. 쿠와바라군처럼 미모가 딸려서 내쳐지는 경우라면 모를까, 싸움에서 살아남은 뒤에도 갓슈의
왕비 참모로서 분명 키요마로의
내조 협조가 필요하다(자꾸 말이 헛나오는데 양해를...;). 물론 현재 갓슈가, 키요마로에 대한 절대적인 의지로부터의 독립을 요구받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지만(라이쿠님 아무리 그래도 이 약발은 너무 셉니다요) 그렇다고 키요마로를 제외하고서는 이야기가 안 되니까(요즘 작가 하는 짓을 보면 못 믿겠다만).
물론 이 만화가 갑자기 [십이국기]로 돌변할 리는 없겠지만, 전투방식도 캐릭터 운용도 이야기 중심도 달라질 것만은 틀림없다. 마물뿐일 그곳에서도 인간과 콤비를 짜야 능력발휘가 되는 식일 것 같진 않고, 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이 필요없다 해버리면 아이들이 거기까지 넘어가야 할 필연성이 적어지니까 말이다(뭐 그런 이유는 만들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
제일 무서운 점이, 아직 이 작가는 마계에 대해서 일언반구 언급도 없다는 것이다. 마계가 어떤 곳인지, 어떤 사회인지 우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도에이의 오리지날 극장판은 적본러브만 건지고 무시하도록 하자). 20권이 넘어간 이제 와서야 정보를 병아리 눈물만큼씩 떨어뜨려 줄까 말까 하는 판이니, 이야깃거리의 여력이 아직도 한참 남아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끌려고 마음먹으면 편집부에서 원하는 만큼 마구마구 끌 수도 있을 거다. 지루하지 않게, 계속 새로운 설정과 이야기를 꺼내면서 말이다. 그만큼 ‘어진 왕’이라는 목표는 멀고도 험한 길이다. 현재 주어진 잡지 연재 시스템의 장점과 단점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닌가 싶다.
상황 연출의 감성설정과 스토리 라인을 이렇게 탄탄하게 짜놓았지만, 이 작품은 그 위에서 재미만 추구하지 않는다. 그와 함께 더할 수 없는 감동과 깨달음을 선사하고 있기에, 나는 이 만화를 좋아한다. 그냥 열혈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포인트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일상에서 오는 아주 작은 감격도, 조그마한 공포도 놓치지 않고 사용하는 느낌이다.
처음에 나온 옥상 사건은 세계의 운명이 걸린 일도 아니고, 누군가의 목숨이 걸린 것도 아니라 작은 소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키요마로가 갓슈의 항변을 듣고 우는 것에 공감하는 것은, 나조차 포기했던 자신을 누군가가 믿어주어서 구원받은 경험이 나에게도 있기 때문이다. 키요마로가 갓슈에게 ‘너와 함께 싸우겠어, 넌 나의 친구다!’라고 외치는 걸 듣고 우는 이유는 나도 혼자였던 시절이 있기에 그 한마디가 얼마나 기쁜지 알기 때문이다.
셰리가 코코의 진심을 깨달았을 때 감동하는 것은 나 역시 친구를 의심했던 일이 있기 때문이고, 셰리가 브라고에게 맹세할 때 가슴이 찡한 것은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감사할 때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키드가 돌아갈 때 눈물이 나는 것은, 내게도 어린 나를 놀려먹는 것이 낙이셨던 할아버지가 계셨었기 때문이다. 파티가 돌아갈 때 슬프면서도 기쁜 것은 죄책감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했던 기억, 그리고 용서받았을 때의 기쁨을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루루가 사라질 때 괴로운 것은 사회의 부조리에 무력했던 자신을 기억하기 때문이며, 레이라가 눈을 떴을 때 감동적인 것은 서로의 마음이 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절절함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요는, 자신 스스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었던 어둠이, 타인이 내밀어준 손으로부터 걷혀진다는 데에 있다. 의심, 포기, 불안, 절망 등의 어둠은 언제나 내면에 자리하고 있어서, 아무리 굳게 믿고 있었던 신념이라도 개의치 않고 헤집는다. 계기가 작은 일이건 큰 일이건 가리지 않고 자신을 좀먹어 들어온다.

하지만 희망은 기대하지 않았던 곳으로부터 오기에 희망이라 불린다. 누군가가 무심히라도 손을 내밀어준다면, 세상 사람이 다 몰라준다 해도 너만 나를 믿어준다면, 그것은 커다란 구원이 될 수 있다. 키요마로나 갓슈와 같이 인생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알쏭달쏭 박사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라이쿠 마코토 씨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난 이들의 직선적이고 순수한 분노를 사랑한다. 꾸밈없는 맨얼굴로, 자신을 위해 타인을 위해 울 수 있는 솔직함이 좋다. 의심 없이 당연한 것을 당연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단순함이 맘에 든다. 나이에 안 맞게 애늙은이처럼 서로를 배려한답시고 빙빙 돌리다 뒤집어쓰지 말고, 터놓고 의지하는 강한 마음을 가진 아이들. 그것이 분명 소년만화의 가장 큰 매력이었을 터. 현실이 아무리 속일지라도 지지 않고, 상처투성이인 채 다시 맞서는 태도 말이다.
한참 미흡하지만, 일단 떠오르는 사항은 대충 쓴 것 같다(겨우 시간에 맞췄다;;).
나름대로 ‘왜 이것이 재미있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애썼지만, 이렇게 말로 옮겨봤자 작품의 뜨거움을 1/99라도 전할 수 있을까. 원작만화도 애니메이션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센스를 자랑하고 있으니, 꼭 한번 보기를 권한다.
어느 소년의 생일날 벌어졌던 일처럼, 당신의 창에도 황금색 태양이 뛰어 들어오기를 기원하며.
다카미네 키요마로의 생일을 맞아
2005년 9월 18일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