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레이어즈, 한국에서 다시 탄생하다

한국 작품으로서의 <슬레이어즈>를 재조명한다


2004년 2월 22일
THE SEA OF CHAOS
LINZEL 시화집 수록


1. 당신도 슬레이어즈 정보통이 될 수 있다! ...과연?

몇 년 전엔가, 혼자서 잠시 떠올렸던 망상이 있었다. 슬레이어즈 FAQ니 클리어 바이블이니 팬들이 정리한 용어집이나 설정집들이 나도는데, [당신도 슬레이어즈 정보통이 될 수 있다!]라는 제목으로 초보자 입문을 위한 단계식 FAQ는 어떨까 라는 생각.
1단계는 그야말로 초보를 위한 질문, 그러니까 한국에서 방영한 ‘마법소녀 리나’가 ‘슬레이어즈’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캐릭터 성격과 스토리 라인, 주제곡 가사 같은 것. 2단계는 작품 내적 요인으로 들어가서 각종 마법이나 세계관의 설정, 일본에서의 인지도와 작품 배경 등을 설명해야겠지.
여기까지는 기존의 설정집과 그다지 다를 게 없다. 그러나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3단계는 1단계 한국 -> 2단계 일본에서 다시 한국으로 리턴해 한국에서 보여졌던 슬레 팬픽의 변천사와 흐름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정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슬레이어즈를 논하는데 팬픽이 빠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슬레 후기 팬픽들은 이미 초보자들과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슬레 팬픽은 이미 본편을 넘어서 공식적인 또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진화하고 있었기에. 하지만 바로 그 3단계 FAQ가 너무도 어려워 보였기 때문에 작성을 포기했다.

한국에서 탄생한 슬레이어즈 패러디월드는 엄청나다. 97년 봄 공중파에서 ‘마법소녀 리나’ 애니가 처음 시청자들에게 첫 선을 보인 이후, 99년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끝도 없이 많은 이야기를 쏟아냈다. 물론 지금까지도 팬픽 연재가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지만, 2000년 즈음부터 PC통신 상의 슬레 팬픽붐은 사그라드는 불꽃처럼 조용해졌다.

슬레이어즈는, 적어도 한국에서라면 애니 본편만 봐가지고는 기존 슬레 팬들과 대화가 안되는 작품이다. 이미 슬레 팬픽의 세계는 원작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기정사실로 인정받으며 기묘한 공존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양을 자랑하는 지지커플 팬픽같은 경우, 원작의 히어로 가우리보다는 인기 캐릭터 1,2위를 다투는 제르와 제로스가 훨씬 많이 다뤄진다. 자연 원작의 커플과는 다른 커플이 판치게 되는데, 그게 어느샌가 자연스러워져서 실연당한 가우리의 시점에서 쓰여진 팬픽조차 있다(온니제롯님의 ‘너를 보내면'). 오죽 리나가 딴 남자랑(?) 놀아났으면 저런 자조적인 얘기마저 나오겠는가.
슬레 후기 팬픽들에서 자주 묘사되는 리나-제르-제로스의 삼각관계, 제르가디스의 불로성(不老性), 마왕들의 고정된 캐릭터 성격 등은 애니나 원작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설정이다. 그런데 99년 즈음에 쓰인 글들을 보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러한 설정들을 풀어넣고 있다. 표절 어쩌고를 논할 수도 없을 만큼 보편적인 이야기로 자리잡고 있기에, 이미 어느 한 작가의 유별난 색안경 설정 수준이 아니다. 슬레 애니만 보고 읽으면 ‘어떻게 보면 이게 이렇게 되는 거지?’ 싶을 정도로 원작과 동떨어져 있다. 라피스 라즐리님의 개그팬픽 ‘선’을 보면, 수왕 제라스가 리나를 놓고 남편감을 고르는데 후보자는 엉뚱하게 제로스와 제르가디스다. 왜 가우리는 포함조차 안되어 있는지 일언반구 설명이 없다. 애니만 본 사람이라면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무엇이 슬레이어즈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1997년, PC통신이 이제 막 대중화되던 무렵, 통신상에 모인 애니 팬들의 가장 뜨거운 화두는 단연 ‘신세기 에반게리온’, ‘미소녀전사 세일러문’, 그리고 ‘슬레이어즈’였다. 에바가 대여점에 나타나면서 아는 사람이 늘었고, 세일러문도 한참 방영하고 있었고, KBS '천사소녀 네티(원제: 괴도 세인트 테일)‘와 같은 시간에 걸리는 통에 시작이 안 좋았던 슬레가 재방하면서 뒷심을 한껏 발휘했다. 공간을 뛰어넘어 온라인에서 모인 시청자들은 여러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동조연쇄를 일으킨 열정들은 활활 불타올라 게시판을 뜨겁게 달궜다. 그러나 단언컨데 가장 오래도록 사람이 끊이지 않았던 게시판은 슬레이어즈 팬클럽이었다. 지금도 당장 한국검색엔진에서 저 세 작품을 쳐보면, 홈페이지 운영이나 활기 면에서 슬레가 단연 독보적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 소개되고 7년이나 지났음을 감안한다면 정말 무섭도록 장수하는 작품이다. 7년... 내가 일본애니계에 발을 들인 기간과 일치한다.

에바가 애니팬들에게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고 토론문화를 발전시켰다면, 슬레이어즈는 공중파를 보던 학생들을 일본애니의 세계로 끌어들여 팬픽과 성우붐을 일으켰다. SBS판 슬레인 ‘마법소녀 리나’의 경우 번역자 자신이 전부터 슬레 팬이었음을 고백한 일이 있고, 성우진의 경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완성도를 자랑했다. 순식간에 한국 성우들 팬클럽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팬픽은 삼대통신망(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을 순환하면서 읽히고 쓰여졌다. 슬레이어즈는 국내 팬픽계의 성장사나 다름없다. 당시엔 팬픽이라는 말조차 없어 몽땅 패러디라 지칭되었고, 그저 시청자들이 슬레를 보고 떠오른 망상을 이야기 형태로 뱉어낸 것이 조금씩 팬픽의 구조를 갖추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보편화된 PC통신이 팬픽시장을 형성하는데 엄청난 몫을 해냈다.

슬레이어즈가 한국 애니계를 한창 달굴 무렵 한국 소설계에 대파란을 몰고 온 ‘드래곤 라자’ 가 나오면서 갑자기 판타지 소설들이 마구 시장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슬레팬픽작가들은 팬픽으로 연마한 솜씨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 꿈에 부풀었다. 우리나라 판타지 시장의 선구자는 ‘드래곤 라자’임이 틀림없지만, 출현한 시기는 슬레이어즈가 더 빠르다. 게다가 가서 사든지 빌리든지 해야 하는 소설과 달리 TV만 틀면 나오는 애니메이션 쪽에서 슬레이어즈가 엄청난 홍보효과를 발휘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슬레이어즈는 일반 학생들에게 일본 애니의 재미, 판타지의 매력, 팬픽의 즐거움, 성우의 위대함 등을 한꺼번에 설파하면서 엄청난 팬층을 형성했다는 얘기다. PC통신붐을 기가 막힌 타이밍에 탄 것도 있지만 그 작품 자체의 능력도 무시할 수 없다.
어째서 슬레이어즈만이 가능했을까? 솔직히 말해서 슬레이어즈는 일본 애니 역사에서 볼 때 그다지 대작이 못된다. 스토리 전개상에 허점이 많고 판타지치고는 세계관이 엉성하기 짝이 없다. 에바처럼 무슨 특별한 문제제기가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고, 아키라처럼 연출이나 구성만으로도 가치를 얻기에는 너무 평이하다. 기존 판타지의 철벽공식을 깨뜨렸다는 의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다지 패러디에 중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선구자라는 칭호를 주기도 뭐하다(전개 및 설정상 제대로 된 패러디물이라기보다는 단순한 일탈에 가깝다).
하지만 슬레이어즈에는 수많은 걸작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 있었다. 파괴자(Slayers)들만이 가지고 있는 것, 슬레이어즈는 대작으로 인정받기 위해 필요한 많은 부분들을 포기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얻었다. 바로 식당을 앞에 둔 리나만큼이나 활활 불타오르는 팬들이다. 어째서 팬들은 이 작품에 열광하는가.


1) 절로 망상을 불러 일으키는 설정

슬레이어즈는 재미있다. 당시 판타지의 판 자도 모르던 나도 순식간에 흡입해버린 작품이다. 이 작품의 최고 강점 중 하나는 개그와 시리어스의 밸런스를 잘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멜로 영화처럼 초반 70% 개그에 후반 30% 신파라는 얘기가 아니다.
리나 일행은 평소에는 즐겁고 낙천적인 여행을 계속하지만 점차 엄청난 사건에 휘말려든다. 그러나 어떤 소용돌이 한가운데 떨어져도 그들은 개그짓을 멈추지 않는다. 넥스트 오프닝에서, 멋지게 주문을 쓰려던 리나의 손에서 오뎅이 튀어나오는 장면은 슬레의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렇기에 슬레이어즈의 세계관 속에서라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개그든 시리어스든 러브스토리이든 여행담이든 전쟁물이든, 슬레 안에서는 제약이 없다. 어떤 얘기를 끼워맞추든 슬레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가기 때문이다(세계관이 엉성하다는 얘기가 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해석의 자유를 부여한다).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쉽다. 슬레이어스 시리즈는 전부 ‘리나가 여행하던 중 생긴 일’을 다룬 이야기일 뿐이다. 그 사건이 좀 규모가 커서 그렇지, 애초부터 특별한 목적이 없었기에 딱히 끝맺음도 없다.
리나는 가우리와 여행을 계속하고 아멜리아는 정의를 전파하고, 제르는 인간이 되기 위해 떠돈다. 이 설정은 처음 네 명의 파티가 시작될 때부터 끝나기까지 전혀 변한 게 없다. 말하자면 그간의 사건들은 외양상으로 그들의 여정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보통 판타지의 용사가 마왕을 처치하기 위해 여행하고, 그 마왕 제거로 이야기를 끝맺는 것과 달리 슬레에서 마왕은(좀 심하게 말해) 최종목적은커녕 리나가 스쳐간 길에 짓밟힌 바퀴벌레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팬들이 이야기를 꾸미기도 편하다. 넥스트도 트라이도 같은 상황에서 시작했고 출발점에 돌아와 끝났으니까, 그 뒤로의 여정을 계속 상상해 나가면 된다. 게다가 이야기를 꾸미기 위해 필요한 마왕은 아직도 한참 남았다.

목적이 없는 여정. 끝없는 자유. 우리의 리나는 인간세파에 찌들려 골머리를 앓을 필요도 없고 성적이 안나와서 끙끙대거나 여비가 없다고 울상을 지을 필요도 없다. 이팔청춘에 마법은 이미 최고수준이며 그 파워는 인간계에서 절대적. 돈이 떨어지면 도적산채를 털면 되고 맘에 안드는 게 있으면 드래곤 슬레이브를 날리면 된다. 그걸 맞고도 사람들은 굴복할 뿐 절대로 죽지는 않는다. 오늘도 뭐 맛있는 거 없나 하며 가우리와 식당을 습격하는 리나는, 현실에 발붙인 우리에게 있어 정말 부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리나에게도 끝없이 트러블이 발생하기는 하지만, 그건 인간사회에서 생겨나는 문제가 아니니까. 이 자유로운 여정에 매료되어 참여하고 싶어진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2) 개성 강한 캐릭터

슬레이어즈의 흥행요인으로 가장 많이 지목되는 것이 캐릭터성이다. 누구네 애니메이션처럼 머리색만 다른 여편네를 줄줄이 늘어놓는 캐릭터물, 그런 게 아니다. 그 어떤 상황을 상정해봐도 ‘얘라면 이렇게 하겠지’가 명확하게 떠오른다는 얘기다. 마치 가까운 친구처럼.

리나, 가우리, 제르가디스, 아메리아, 제로스 이 다섯 명은 서로가 너무나도 강렬한 개성을 갖고 있다. 강렬한 만큼 행동패턴을 예측하기도 쉽다.
1. 고대유적을 발견했을 때 2. 식당에서 밥먹을 때 3. 도적산채를 습격할 때
간단히 이 세 경우를 상정해 봐도 슬레를 본 사람이라면 각 캐릭터에 대해 어떤 ‘고정된 이미지와 역할’이 딱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가령 2번의 경우 세명은 몸싸움하며 고기를 뜯을 테고 한명은 얌전히 외면하며 차 마실 테고 마지막 한명은 빙글빙글 웃으며 쳐다볼 테고, 3번의 경우 한명은 나무 위에서 일장연설하고 한명은 공격마법을 퍼붓고 남자들은 안쓰러운 표정, 무표정, 웃는 표정을 각각 하고서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할 거다... 라는 식이다.
프로가 아니라 아마추어인 팬픽 작가들에게 있어, 흐리멍텅한 성격의 캐릭터는 그만큼 묘사하고 예측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팬픽이란 건 원작이 엄연히 존재하는 특성상, 기존 팬들 모두에게 어느 정도의 납득을 얻어내지 못하면 실패한다. 팬들이 모두 마음 속에 품고 있을 ‘이런게 리나다’라는 상에 맞추지 못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슬레이어즈는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그 인상이 강렬하다. 그만큼 캐릭터들을 그려내기도 상대적으로 쉬워지게 된다.

더군다나 강한 캐릭터는 그만큼 반전시키기도 쉽다. 극과 극은 통한다 했던가. 어떤 적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리나라고 해서 좋아하는 사람 앞에 얼굴이 발개진 리나를 인정하지 못할 리 없다. 쿨가이인 척 하다가 당황해가지곤 ‘그건 비밀이야!’라고 말하는 제르가디스라든가 가끔씩 제대로 된 사고로 사람을 놀래키는 가우리 등도 팬들 뇌리 속에 남아있다. 기존의 이미지를 뒤집어서 가우리가 머리가 나쁜 이유를 다르게 설명하거나(‘그대의 기억을...’ 임경희님), 어린 시절의 제르를 상상하는 것도(‘각인....’ 이진의님)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거리가 된다. 슬레이어즈는 그야말로 세계관에서나 캐릭터에서나 전천후 멀티 플레이어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3. 주체적으로 바뀐 시청자, 자기 목소리를 내다

팬픽의 좋은 점은 일정 팬 확보가 시작부터 가능하다는 점이다. 자신의 머리 속에 떠오른 어떤 재미있는 아이디어나 모티브도, 누군가 들어준다는 느낌이 없으면 지속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모티브를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로 발전시킬 때, 하나 하나 설정해가는 것은 즐겁기도 하지만 동시에 노가다이다. 우선 확고하게 캐릭터들이 설정되어야 그들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웬만한 재능이 없으면 안 된다. 애써 이야기를 만들어도 누군가 읽어주지 않으면 기운이 빠지고... 하지만 같은 이야기라도 팬픽으로서 쓴다면 공명심 충족이 가능하다. PC통신의 힘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얘기다.

팬픽을 형성하는 가장 큰 요소는 뭐니뭐니해도 욕망이다. 사랑스러운 캐릭터들, 저들을 통해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보고 싶다는 욕망. 혹은 이미 결정된 물줄기를 자신의 힘으로 바꾸고 싶다는 욕망. 그 덕에 팬들은 리나제르 팬픽이나 제로제르 팬픽, 캐릭터 개인의 내면을 파고드는 이야기, 항마전쟁이나 용족마족의 과거를 넘나들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이 원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문장력이나 깊이가 떨어져도 눈감고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시 슬레이어즈를 보던 많은 학생들(애니팬이 아닌 사람들도 포함해서)은 판타지의 매력에 그리고 리나 일행의 자유로움에 매료되어, 이미 벌려진 슬레이어즈의 판 위에서 자신의 욕망을 펼쳐 보이기를 원했다.
누구나 이야기를 하고픈 욕망은 있다. 단지 이야기를 만들어낼 기회가 주어지지 못한 것뿐이다. 슬레이어즈의 세계관은 어떤 소재도 소화할 수 있었고 캐릭터들은 어떤 역할에도 맞출 수 있었다. 팬픽에 따라 슬레이어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판으로 변모했다. 가벼운 개그서부터 시작해서 비극적 러브스토리까지, 캐릭터만 빌려온 메르헨 뒤틀기나 현대물 혹은 SF물도 리나 일행의 힘으로 인해 생명력 있는 이야기가 되었다.
이건 잘 만들거나 걸작이라고 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슬레이어즈였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칸자키 하지메라는 드뤼셀마이어 아래서 화키아처럼 ‘세계를 바꾸는 힘’을 사용하는 쾌감이란!

더 이상 슬레이어즈는 화면 속에 갇혀 있지 않았다. 팬들이 이야기하고 만들어가는 슬레이어즈 팬픽들은 거의 ‘원작’과 같은 수준으로 영향을 끼쳤고 독자들은 그 한글자 한글자에 일희일비를 거듭했다. 리나와 그 일행들의 강렬한 캐릭터성에는 깊이가 더해졌다. 욕망의 요구에 따라 원작의 설정을 상당부분 각색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팬픽이 좋은 거 아니겠는가. 팬들에게 원작만큼 대접받는 것과 별개로 팬픽은 절대 원작이 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만큼 제약을 덜 받는다.
슬레이어즈가 우리에게 주는 테마가 고정관념의 파괴, 끝없는 자유 추구라고 한다면, 슬레이어즈의 정신을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도구는 팬픽 아닐까. 일정한 캐릭터성의 약속 외에 모든 것을 바꾸어 표현해보는... 이토록 팬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함께 호흡한 애니는 한국에선 슬레이어즈가 유일하다고 본다. 슬레이어즈는 분명 일본의 애니지만, 팬픽만은 한국의 것임에 틀림없다. 에바 팬들이 감독이 내놓은 수수께끼 해독에 열중하는 동안 슬레 팬들은 원작의 설정을 과감히 무시했다. 그리고 그들만의 슬레를 구축했다.

팬픽에서 아메리아는 리나 언니, 제르가디스 오빠라는 호칭을 쓰지 원작처럼 ‘씨’를 붙이지 않는다. 팬들은 대사를 읽으면서 귓가에 최덕희님과 김승준님의 환청을 듣는다. 제로스는 반마족인 제르가디스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다. 제르가디스는 영원한 시간의 고독을 안고 여정을 계속한다. 한국의 팬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한 새로운 설정들은 분명 또 하나의 슬레이어즈를 창조해냈다. 한국의 이야기로서.


4. 데이터 베이스 구축이 시급하다

감히 단언컨대 슬레이어즈는 국내의 판타지팬, 일본애니팬, 국내성우팬, 팬픽시장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애니다. 한국의 애니 연대기에 남고도 족할 만큼 커다란 위력을 발휘했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야오이가 정착된 팬픽문화와 달리 순진하던(?) 시기라, 팬픽과 패러디도 구분 못하다가 천천히 변화되고 성장해 가는 슬레 팬픽 역사는 슬레 팬들의 자랑거리일 뿐만 아니라 애니팬에게도 귀한 연구자료이다.

그런데 데이터 베이스가 안 되어있다. PC통신의 몰락과 동시에 온라인의 팬픽들도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린젤이나 암시장, Act 등등 몇몇 홈이 데이터 보존상태이지만 이것도 슬레 정도 되니까 가능한 얘기다. 나우는 그나마 나은 상황이나 자동 글지우기 기능이 걸린 천리안은 말 그대로 전멸이다.

물론 나도 꽤 많은 팬픽들을 하드 내에 저장해 놓았었다. 그런데 7년이라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가끔 다시 읽을 때마다 눈높이가 높아졌고, 그다지 별로라고 느껴지는 것들을 지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와서야 그게 둘도 없이 귀한 자료임을 깨달아버렸다. 설령 문장력이 딸리더라도, 어설프다 해도, 그것들은 그 당시 살아서 진화하던 슬레 팬픽계를 반영하는 이야기들이었는데...! 지금 내게는 제르 불노설이 언제쯤 출현했는지, 제로제르 커플링은 언제부터 나왔는지, 리나제르제로스의 기묘한 삼각관계는 언제 이루어졌는지 알아내는 게 불가능하다. 턱없이 자료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슬레 팬픽은 하나만 동떨어져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어 이야기를 쓰면 다른 누군가가 그것을 어레인지하고, 또 누군가가 플러스 알파를 붙이고 해서 새로운 설정이 정착되는 식으로 이루어졌기에 잘 쓰여진 팬픽들만 모아가지고는 팬픽 변천사 파악이 불가능하다(이걸 좀 유식한 말로 ‘상호 텍스트성’이라고 한다). 요즘 심정이 어떠냐 하면 이사할 때 집에 있던 고전 LP들을 내다버린 뒤 몇 년 후 그게 고가로 경매되는 걸 목격한 기분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일본에서 사온 비싼 OST보다는 한국에서 만들어낸 조잡한 로봇장난감이나 추억의 만화주제가 테입 쪽이다. 그만큼 한국에서는 애니나 애니산업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이 안 되어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태권브이 필름소동이 가장 그 대표적인 예이겠지만, 그거 아니라도 출신이 일본이라는 이유로 내팽개쳐진 애니 자료들이 너무도 많다. 태생은 일본일지 몰라도 ‘미래소년 코난’ 주제곡만은 우리 거고 챙길 사람도 이 나라 애니팬뿐이다. 그나마 주제가 테입은 형체라도 있지, 온라인에 올라왔다 정기적인 글 삭제에 걸려 지워지고 흔적도 없는 팬픽들은 구제하기가 어렵다. 애니 팬픽시장을 활성화시킨 슬레이어즈조차도.

슬레이어즈 팬픽시장은 팬픽의 변천사, 자유로운 욕망의 분출, 애니팬 증식 역사 등을 뚜렷히 보여주는 귀한 연구자료이다. 이걸 남기는 것은 한국 슬레이어즈 팬들, 아니 애니 팬들이 해야 하는 책임인 것이다. 슬레이어즈 팬픽시장과 같은 무대는 변하는 시대성격상 두 번 다시는 구축되지 않는다.
PC통신이 아닌 인터넷이 자리잡은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팬픽들의 위치는 되려 위축되었다. 이제 우리는 일본에서 방영되는 애니를 실시간으로 볼 수도 있고 성우나 감독, 원작 정보도 직빵으로 알 수가 있다. 제로스 이미지송 가사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 영문 해석본이 돌아다니던 그 시절과는 다르다는 거다. 허나 너무 잘 알게 되면 도리어 상상력이 제약된다. 슬레이어즈만 해도 새로 덧붙여진 팬덤 설정 중 원작에 정면 대치되는 것이 꽤 있다. 그러나 당시엔 몰랐기에 넘어갔던 것이다. 팬픽계에서 기정사실화 된 후에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으나, 아무리 팬픽이라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임의적인 설정을 주장할 맛이 날까. 당장 태클이 들어올 텐데.

또 일본 애니를 실시간으로 보는 만큼, 팬픽에 일본색이 짙어진다. 원판 애니를 계속 보는데 일본식 어투나 개그가 자연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건 마치 자신의 몸에 김치 냄새가 배었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 팬픽인 이상, 팬들을 위해 원작의 이미지에 맞춰야 하니 일본색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 ‘마법소녀 리나’로 걸러져 들어오던 때랑 다르다. 그땐 방영만 해주면 감지덕지였는데, 요새는 방영하면 방송국 홈페이지에 몰려가 집단으로 항의하는 시대니까.

슬레이어즈가 한국에서 천하를 잡았던 97-99년은 나에게 있어서도 새로 거듭나는 시기였다. 그리고 그 시기에 뿌리를 박고 나는 아직도 이 세계에 서 있다.
에바 극장판이 나온 뒤 팬들이 가장 많이 한 소리는 ‘어쨌든 에바는 끝나버렸다’였다. 에바 논쟁이 자취를 감추고, 세일러문 사이트가 문을 닫아도 슬레이어즈 홈페이지들이 아직도 활동을 계속하며 장수하는 이유는 팬들의 가슴속에서 이야기가 미완이기 때문일 것이다. 마왕도 여행도 제르(미안)도 그대로. 싸움도 하나의 사건일 뿐, 여행은 언제까지고 계속된다.
SLAYERS 4 the future!

by 살아가자 | 2005/11/07 19:39 | 활동사항 | 트랙백 | 덧글(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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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미로 at 2005/11/07 20:03
어느 팬픽 후기였던가, 그런 말 있었죠. "이 녀석들은 3천년이 흘러도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이 여행하고 있을 것 같아요"
그때는 웃었는데 지금은 그 말이 왜 그렇게 사무치는지 나이 든 사람처럼 눈물이 나옵니다^^;
Commented by 眞伶 at 2005/11/07 20:59
시화집 읽으면서 끄덕끄덕 했던 글이네요^-^;
(<-8월 슬레존때 본인이 서울 못 올라가서 아는동생에게 부탁해서 슬레존만 쓸어서 택배받은녀석)
리나'언니'라고 부를수 있었던 때부터 좋아해서 지금은 어느 덧 리나도 동생뻘이 되어버리고..
아마 리나가 손녀뻘이 되어도 좋아하겠지만요.-제가 제로스나이만큼 산다고 해도 좋아할거라고 단언할 수 있어요.
Commented by 존다리안 at 2005/11/07 21:23
확실히 제르가디스 만큼은 제 기억에 확실히 각인된 캐릭터입니다.
우리 친척 동생은 "돌맹이 얼굴"로 기억하고 있었죠.
생긴 건 돌맹이 얼굴이지만 바탕은 미청년이죠. 성격은 전 일행
중에서 제일 제정신이고 막나가는 리나일당 탓인지 불평 불만
이 깨나 많고 이따금 스스로도 이미지 구기는 짓을 합니다.
덕분에 저에게 있어 살아있는 캐릭터라는 느낌을 줬죠. 역시
슬레 캐릭터들의 개성 덕일까요?
Commented by 미드 at 2005/11/07 23:13
저역시 슬레이어즈를 시작으로 팬픽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굳히고 지금 이 자리에 서게되었기 때문일까, 무척 공감되는 글이었습니다. 원작을 뛰어넘어 각종 팬픽으로 울고웃고 떠들던 PC통신 시절이 소록소록 그리운 기억으로 떠오르네요^^
Commented by 벨제뷔트 at 2005/11/08 00:23
'그때는 방영만 해주면 감지덕지하던 시절이었는데 요새는 방영하면 방송국 홈페이지에 몰려가
집단으로 항의하는 시대'라는 대목에서 무어라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솟구치는군요 TT.
Commented by 산왕 at 2005/11/08 02:27
벨제뷔트님의 덧글에 공감 100%입니다 ㅠ.ㅠ
Commented by 탁상 at 2005/11/08 03:03
뭔가 정리라는거는 의미가 참 큰거 같습니다.
저는 겨우 제가 아는 범위에서만 몇가지만 끄적여놨을뿐인데....
아무튼 이번에 기대가 큽니다.
Commented by Jerry at 2005/11/08 04:05
마지막 줄을 보고 정말 오랜만에 4 the future를 꺼내 듣고 있습니다.
(그저 음악이 나와야 불타오르는 사람임!)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5/11/08 19:43
미로님 / 정말... 눈물 나와요... ㅠ_ㅠ 몇년 지났다고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걸까요. 하지만 너무도 강렬한 기억이니까.

眞伶님 / 저는 정작 그 시화집 못 가지고 있습니다 OTL 그때 독일여행 가느라고 슬레존에 못 갔거든요 ;ㅁ; 방심했다가 당했다 우오!
정말.... 그 시절엔 위대해보였던 리나가 이젠 저보다 훨씬 연하가 되어버렸군요. 그래도 여전히 대단한 여자애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만.

존다리안님 / 당시만 해도 굉장히 파격적인 캐릭터들이었으니까요.

미드님 / 저 역시 그렇습니다. ^^ 슬레팬덤이 오래 지속된 힘도 팬픽이 만들어내는 끝없는 이야기거리 덕이었다고 봐요.

벨제뷔트님 / ...예. 그때는 장편 TV 애니를 볼 수 있는 길은 공중파와 케이블밖에 없었으니까요. 매번 학원 시간에 시달리면서 빠질새라 챙겨봤던 그 시절이 참으로 아련합니다 크흑.

산왕님 / 암요 ㅠㅠ

탁상님 / 정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고, 남지 않으면 잊혀지니까요.

Jerry님 / 저 문장 붙인 것에 호응이 좋더라구요 ^^;
Commented at 2005/11/10 20:3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5/11/10 20:4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5/11/10 20:4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5/11/11 00:29
비공개님 / 아앗, 자세한 해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렇잖아도 팬픽만이 아니라, 그 팬픽을 낳은 팬덤문화에 대한 조사와 정리가 필수적이라고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차입니다. 문제는 제가 당시 어렸고 부외자(=유령)로서 글만 읽었기 때문에 전혀 모른다는 거거든요. 범위를 넓혀서 분발하겠습니다.
Commented by xeno at 2005/11/11 22:03
살아가자님 글의 공감가는 부분이 정말 많습니다. 슬레를 통해 애니메이션에 눈을 뜨고 동인을 알게 되고 성우님들 팬클럽에서 활동도 하고 지금까지도 이렇게 기억하고 좋아하고 있습니다. 정말 첫사랑 같은 작품이지요. 그 당시 테이프에 녹음해서 듣던 노래들. 다이어리에 끄적여넣은 흔적들이 다시 한번 보고 싶어지네요.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5/11/12 00:05
첫사랑이라는 말이 딱 맞을 겁니다 :D
그 당시 수많은 학생들의 순정을 뺏아간 죄많은 작품이지요 ^^;
다이어리에 그 노래 가사들을 끄적거리고 한 것은 저만이 아닌 모양이네요.
Commented by 소아나 at 2006/01/19 19:42
정말 사랑했습니다. ^^; 저는 그 떄가 초등학교 1학년이던가 2학년이던가-_-a 슬레이어즈 주문같은 거 막 외우고, 마법소녀리나라는 책도 두어권 사고 (그 다음권을 눈이 빠져라 기다렸는데 안 나오더군요; 애니 내용을 단순 서술식으로 쓴 걸로 볼 때 판권이 없었나봐용) 나도 마법학교에 가고 말겠어! 라던가, 두 손을 모으고 열심히 힘을 모으던게 생각나네요. 아으, 다시 보고 싶습니다. ㅠ_ㅠ 그 열정은 세일러문으로 이어졌지만, 역시 마법소녀리나도 정말 못잊을 작품이죠. '마법소녀 리나'를 더 연구해보고싶네요. ^^
Commented by 코타츠 at 2006/11/08 15:19
굉장히 늦은 코멘트군요; 저도 슬레이어즈가 가장 먼저 빠지게된 첫사랑이죠. 이 첫사랑이라는 말이 굉장히 잘 어울리는게 맘에들네요. 애니만 보다가 2000년에 저희집이 인터넷이 되면서 슬레이어즈 팬픽을 접하고는 미친듯이 빠져들어 애니, 노래, 그림 등 슬레이어즈에 관한건 쓸어모아 보관하고, 노래가사를 메모지에 적어 외우고 다녔었죠. 노래는 모조리 아직도 듣고 있으며 외웠던 가사도 거의 기억합니다. 정말 제 만화인생에서는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작품이죠. 어제 이 글을 읽고 원작 소설을 다시 꺼내 읽고있답니다. 원작을 다 읽고나면 아직 남아있는 옛날 슬레이어즈 팬픽들을 다시 찾아 읽어볼 생각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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