츄츄와 나 ①
이 <츄츄와 나> 포스트 시리즈는, 츄츄라는 작품이 저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 적는 글이 될 겁니다.
작품론이 아닙니다. 97 세대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제가 츄츄에 반해버린 외적 요인 역시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정리해보려구요. 원래 지난 츄츄 기념일부터 시작하려고 했는데, 슬레 건과 겹쳐서 좀 늦어졌습니다.

당연히 개인적인 경험 이야기가 잔뜩 들어갈 테니, 작품론 외의 개인사에 흥미 없으신 분들께는 민폐잡음 포스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주절주절 자기 혼자 아는 얘기만 늘어놓는데다 재미까지 없는 과거사 삽질 포스트는 저부터가 제일 꺼려하는 부류이기 때문에 발랄하게 갈 거지만...(아니 그렇다기보다 츄츄 얘기를 쓰는데 어찌 안 발랄할 수 있겠어요!!! 인생이 변했는데!!! <- 광신도)

자기 세계에 파묻혀서 삽질하는 포스트가 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개인사이긴 하지만 그래도 츄츄 얘기입니다. 어쨌거나 입을 열면 츄츄 얘기밖에 안 나오도록 구강 구조가 진화를 끝마친 게 이미 옛저녁입니다. 다른 분들이 각자 품고 계실 소중한 첫만남의 기억에 비교하면 어떨런지 모르겠네요.
읽어보실 분은 Go~!









 

제가 츄츄와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삼년 전, 뜨거운 햇살이 작렬하는 미국의 사막 한구석에서 수학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중 2로 올라가기 직전인 봄방학, 표지의 로봇 디자인이 너무도 피골상접해서 라는 이유로 우연히 대여점에서 빌려온 에반게리온 1-2화를 보고서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한 타격을 받았었습니다. 그 이후 5년 간 이차이차 저차저차 차마 하룻밤으로는 끝낼 수 없게 눈물나는 구구절절한 삽질의 사연들을 뛰어넘어서, 일어일문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지요. 중고등학교 시절을 일본 애니 불법 테이프와 함께 했더니만 성적은 바닥을 쳤고 남들과 비교해 있는 스킬이라곤 저절로 익히게 된 일어회화밖에 없었거든요. 그러고보니 고등학교 2학년 때 보다보다 못한 어머니께서 강남의 모 입시학원으로 저를 끌고 가셨었는데, 테스트를 해본 강사분께서 한숨 푹 쉬면서 “이 아이는 이미 늦었습니다. 왜 이제야 데리고 오셨습니까?”라고 했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암환자냐?!

여튼 IN SEOUL은 절대 무리라던 그 때의 강사 말과는 달리, 어찌어찌 맘에 드는 대학과 학과에 진학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대학에만 들어가면 뭔가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던 기대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더라구요. 사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 인생 그렇게 짧지 않고 세상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뭔가 해결되고 보장될 거라는 기대라도 없으면 닫힌 세상에서 조여오는 수험의 압박감을 정신적으로 견디기 어려웠거든요. 막 입학한 동기들이 1학기 내내 술자리에서 시간을 썩혔던 것도 그런 허무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저야 술을 안 마시니까 그러진 않았지만, 의욕상실에 시간을 그냥저냥 흘려보내고 있다는 점은 똑같았어요. 그러다 기회가 닿아서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갈 수 있게 되었지요. 아직 1학기밖에 다니지 않은 상태였지만 슬럼프로 정체되어 있는 자신을 어떻게든 벗어던지고 싶었기에 새로운 환경에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오랜 세월 애증의 대상이었던 일본 애니에 작별을 고하려고 생각했었어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 에바 마지막회가 정발되지 않았던 탓에 서울로 무작정 상경해 원판을 사들고 내려와 엔딩을 보고 울었던 순간, 저는 제가 추구할 만한 가치를 그 안에서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태클 걸지 맙시다. 당시 질풍노도기에 갓 들어선 만 14살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 애니에 맹목적으로 빠질 수 있었던 거구요. 이것은 가치있는 무언가라고, 그냥 놀고 있는게 아니라고 믿고서. 어른들이 몽땅 못마땅해 보일 시기인데다 청보법이니 애들 만화니 하는 외부의 압박도 있어서 더 그랬습니다. 궁핍한 주머니로 하나하나 찾아서 보는 작품들마다 뭔가 제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게 절정을 이뤘던 것이 바로 우테나와 만났을 때였구요.

그리고 오랫동안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소녀혁명 우테나 이후 어떤 작품을 소비해도 성이 차지 않았어요. 작품을 ‘좋아하는 것’과 ‘가치를 발견하는 것’은 조금, 아니 많이 다르거든요. 저에게 신지평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던 에반게리온도 클램프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오만함과 얄팍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서 밀려났고요. 그러다 대학에 들어오면서, 도대체 내가 이 안에서 내 미래에 관련해 무슨 비전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팬픽도 팬아트도 못하면서 같잖은 글줄이나 끄적대는데 말이예요. 일본인도 아니면서. 그간 혼자서 무진장 허송세월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어요.
뭐 그래서, 모뎀으로 영위하는 미국 연수 중에는 애니를 볼 수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멀어지면 되는 거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연수를 결심한 이유가 죄다 도피성이지만 당시의 제게 있어 절대 나쁜 선택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제가 멋대로 결심하거나 말거나,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더군요 -_-;
연수 시작하고 불과 3개월이 흘렀을 때, 이제 겨우 버벅대지 않고 쇼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해졌을 무렵 한국 웹에서 츄츄 1부의 스포일러를 당했습니다. 우테나 이후 처음 보는 초현실주의 작품이라는 평가에 낚였음을 고백합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모뎀이라서 못 본다’던 말이 실은 이유가 아니라 자신에게 마련해둔 핑계임을 깨달아버렸습니다. 그 길로 한국만큼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속도 나오는 학교 컴퓨터실에 달려가서 음향이 제대로 나오는지 테스트 해본 뒤에 츄츄 2화까지 보았지요. 그 뒤로 그곳에서 츄츄 2부를 실시간으로 보면서 해댄 갖가지 삽질은 츄츄 엔솔로지의 <츄츄좀비 진행기>에서 털어놓은 바가 있으니 그쪽을 참조해 주세요. 읽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단 10분밖에 되지 않는 그 영상을 보기 위해서 별이 총총한 새벽 4시에 컴실로 달려가거나 다운되길 기다리다가 수업에 지각하거나 하는 삽질은 물론이고, 도중에 신X로가 해외 이용자 다운서버를 막는 바람에 다운도 못하다가, 지인 분을 통해서 받기 시작하니 클럽의 업금지 목록에 오르고 아주 별의별 일이 다 있었습니다... 테이프로 입수하던 시절에도 이런 심한 장애를 연타로 겪어본 일이 없었는데.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놓여날 수가 없었어요.
츄츄 13화를 본 순간, 알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우테나 이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혹은 에바처럼 어려서 부화뇌동했다고 생각했던 가치가 여기에 이렇게 살아있다는 걸. 다시 한번 내 모든 걸 걸고서 추구할 만한 가치가, 츄츄 안에 분명히 존재한다고요. 우테나 이후 4년을 기다려왔던 시간이 비로소 의미를 획득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나중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더라도 이 환희를 부정하거나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겠다던 6년 전의 어느 겨울날만큼이나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라고 맹세해놓고 중간에 딱 한번 에바를 본 걸 후회하긴 했었지만, 어쨌거나) 그리고 그 기분은 저로 하여금 변화의 첫발을 내딛도록 떠밀기 시작했지요.
무엇보다 다른 분들의 분석글을 읽으면서 에바에 불타오르던 시절과는 달리, 츄츄는 혼자 보고 즐기는 걸로 끝낼 수 없는 절박&처절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마이너였거든요.


② 로 계속 (언제 나올지는 나레이션 아주머니만 아십니다)
by 살아가자 | 2005/11/24 15:58 | 루우의 사랑고백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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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묘희猫姬 at 2005/11/24 16:26
마지막의 '마이너였거든요' 한 구절이 가슴을 칩니다...IIIOTL 그래도 츄츄는 마이너였기에 얻은 점도 많기 때문에 이제는 마이너인것조차도 당당할 수 있어요. (무슨 소리야 ㄱ-;)
Commented by Meister at 2005/11/24 19:04
...마이너도 나름대로 장점이 있습니다. 천천히 생각해보고, 스스로 결론내리고, 그 모든 것을 어떤 외부의 영향도 없이 오롯이 자신 안에서 갈음해 천천히 숙성시킬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축복입니다.
예. 마이너 인생 10년의 제가 말하는 거니까 믿으십쇼.(..OTL)
제 기준으로 치자면, 주변에 같은 시기에 같은 애니를 보고 무려 msn대화가 가능했다는 것만으로도 츄츄는 메이저였습니다. ..온리 이벤트를 다 여시면서 무슨 마이너라고 땅을 치십니까요.
Commented by ranigud at 2005/11/24 21:42
어이쿠야... 마지막 멘트가 정말 가슴을 치고 땅을 치고 통탄할 노릇입니다요...ㅠㅠ
Commented by 마스터 at 2005/11/24 22:02
이야기를 듣고 싶은 방문객들은 따라가겠습니다아~!
Commented by 깃쇼 at 2005/11/24 22:17
(마스터 님의 뒤를 따른다)
후후, 마이너 인생 **년인 사람도 여기 있습니다. 그러니 암환자 부분에서 웃어버린 걸 용서해주시길;
Commented by 검은고양이 at 2005/11/25 02:05
마지막.. 사무칩니다.. 털썩...
Commented by Jerry at 2005/11/25 02:08
츄츄는 이미 신앙입니다.(단호)
2편 기대합니다~
Commented by zero at 2005/11/25 02:45
.......마지막말에서 대략 정신이...(아니 너무 사무쳐요!!!:ㅁ; )
Commented by 아사히 at 2005/11/25 05:27
아니, 정말 그랬단 말야?! 아무리 학원 강사라고는 하지만 말이 좀..;; 진짜 불치병 걸린 환자한테 의사가 한탄하면서 건네는 전형적인 대사 그대로구만. ㅡ.ㅡ;;

대학 1학년 첫학기를 술과 허무감과 슬럼프와 의욕상실로 보내는것은 대한민국 공통현상이려나. 확실히, 수능만을 바라보고 십몇년동안 목숨걸고 달려갔는데 '달려간 그 끝에서 달라지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라면 그 허무함이 장난 아니겠지...만, 목숨걸고 달리다가 갑자기 차원이 다른 세계로 끌려가버린 나는 허무함에 짓눌려 발걸음을 멈출 기회도 없었어! 너무 놀다가 지겨워서 쓰러질정도로 한번 신나게 놀아보고 싶어. 엉엉. ㅠ.ㅠ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5/11/25 09:53
묘희님 / 가난이 죄가 아니듯 마이너도 죄가 아닙니다.(...)

Meister님 / 그럼요 ^^; 이제 와서 생각하면 츄츄는 동인계에서 책이 안나온다 뿐이지 보실 분들은 다 보셨으니까요. 하지만 저 시기에는 츄츄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었을 뿐더러, 저 자체가 온라인에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예, 유령인생이라...). 6년 간 버닝토크라는 문화 자체를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감상문들이 도통 안 나오니 괴로웠다구요......! 랄까 온리전은 완전히 자급자족이잖아요 ;ㅁ; 그래도 열 수 있는 용기가 생길 정도로 마이너가 아니라는 확신이 생겨서 가능했던 거지만.
(실은 2탄의 내용이라는 게, 유령에서 탈피해서 동료 모으는 스킬을 익히는 경위입니다 ^^;)

ranigud님 / 다들... 외로우셨군요.....

마스터님 / 넵!!! (졸졸졸 따라간다)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5/11/25 09:53
깃쇼님 / .....애니원 이벤트날 깃쇼님과 처음 뵈었을 때 들려주셨던 말씀은 아직도 제 가슴 속에 고이 박혀 있답니다. 으흑 처절한 마이너의 가시밭길 orz

검은고양이님 / 당신은... 혼자가 아니예요.....! <-;;;;;;;;;

Jerry님 / 교주님도 모시고 계신걸요 (푸훗) 기대해주신다니 감사 ^^

zero님 / 외로워하지 마세요... 모두 함께 달리면 마이너의 길도 무섭지 않습니다! <-....

아사히 / 어 그랬지 ^^; 지금도 그 얘기 나오면 전 가족이 폭소를 터뜨린다니까.
솔직히 십몇년 동안 내내 수험을 의식하며 목숨걸고 뛴 건 아니라도, 고 2 때부터의 압박은 장난 아니었지. 너야 정신없이 휘둘리는 인생을 살았으니까 예외고....
하지만 그런 식으로 노는 건 노는 게 아니었어. 놀 줄도 모르는 시간낭비일 뿐이지. 차라리 뼈빠지게 일하더라도 내가 목표로 하는 뭔가를 위해서 뛰는게 낫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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