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유유백서 장편 팬픽 <KASUKA> 감상
shade님께서 소장본을 빌려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흔히 모든 존재에 존재하는 의미가 있다고 말하듯이, 세상 모든 이야기에도 존재의 의미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단, 모든 존재가 살기 위해 만들어낸 사회와 관습과 규칙에 얽매여 우열과 열등, 고급과 저급, <있어야 할 것>과 <있어서는 안될 것>을 가르듯이 - 이야기도 똑같다.

타인의 상상에 무등을 타고 태어난 2차 창작은, 현실에선 일종의 서자 반열을 벗어나지 못하는 숙명을 업게 된다. 대부분의 경우 떳떳하게 빛을 볼 수 없는 게 사실이며, 원작 팬덤의 좁은 바닥 안에서 몇몇만의 기억 속에 남겨진 채 조용히 사라져간다. 나는 그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정당한 아버지와 어머니 아래서 태어나지 못한 이야기는 소유권으로 자기 주장을 해야 하는 이 사회에서 결코 동등하게 인정받을 수 없다. 받아서도 안되고.
나는 그 이야기 하나하나가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다.
이것들이 세계문학사에 남을 만한 걸작들도 아닐 테고 전해지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이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지만, 그 팬픽들은 나의 유년시절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울고 웃은 것은 가짜가 아니다.


이제 와서야 접하게 된 <KASUKA>에 불타기에는 제대로 된 유유백서 팬도 아니었고 시대도 트렌드도 너무 지나가버렸다. 하지만 500p에 달하는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후기에 적힌 탄생배경과 제작경위를 보면서 시대를 절감했다. 이 팬픽은 유유백서 후반부에 점프의 압박으로 토가시씨가 날려먹은 설정을 퍼즐 맞추듯이 끼워서 하나의 세계관을 완성하고 있다. 오리지널 캐릭터의 비중이 크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원작 캐릭터들도 잘 살아있으며 이야기도 재미있고, 원작 설정의 허점을 보완하며 당시의 일대 화두였던 '세계냐 개인이냐'라는 테마까지도 나름 심층있게 접근하고 있다. 그 시절이라서 탄생할 수 있었던 이야기. 지금은 태어날 수 없는 이야기.

<유유백서>의 서자든 시대의 의의든,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그저 이 이야기가 살아남아서 내 손에까지 닿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싶다. 작중에서 카스카에게 그랬던 것처럼.



p.s : 번역서는 아니지만, 말로만 듣던 건전소녀의 책을 접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난 동인지 문화를 접한 것 자체가 늦었다). 한 해가 지날 때마다 나타나는 한 울타리 안의 세대 단절은 너무도 강해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1세대 동인녀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그것부터 누가 정의를 좀 내려줬으면 좋겠다.


p.s 2 : 저자 서현아씨가 유유백서에 빠진 것은 1995년. 작가의 후기를 읽으면서 겨우 십년이 지났을 뿐인데 모든 것이 바뀌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특히 현지 정보의 단절이라는 점에서). 일본만화 해적판, 불법 소설판이 빼곡하게 꽂혀있던 책방이나 복사 비디오 테이프들이 너무도 당연하게 나돌았던 거리가 아주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 현실에 위화감이나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점 때문이겠지. (다운로드도 마찬가지지만, 이 경우는 중개무역상이 장사하는 건 아니니까)
지금 생각해도 파름문고나 캔디캔디 후속편은 정말 압권 -_-;


p.s 3 : <강철의 연금술사>도 덕분에 잘 보고 있습니다! 제 가슴 속에서는 역시 <기생수> 번역이 최고지만요 ^^;
by 살아가자 | 2006/01/28 19:05 | 동인지 | 트랙백 | 덧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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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6/01/28 19:50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6/01/28 19:5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at 2006/01/28 20:26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mirugi at 2006/01/28 20:37
'1세대 동인녀'란 단어를 어떤 범위로 할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질 것입니다. 일단 동인지를 제작한 1세대에 속하는 분들은, 1960년대생으로 1980년대 초반에 대량으로 유입된 일본 소녀만화 (주로 이케다 리요코, 미우치 스즈에, 우에하라 키미코 작품들)를 읽던 분들이라고 해야할 겁니다. (그보다 이전에 존재했던 동인지는, 지금의 동인지와 그 소속(?)이 너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지만 이것도 이견이 있을 수 있겠죠. 또 연구를 통해 뭔가 새로운 동인지가 발견되거나 하면 이런 통설도 바뀔 수 있겠고……. 아직 뭔가 정설이 서있지 못한 분야니까요.)

다만 이 분들이 당초부터 야오이를 즐겼던 것은 아니겠고, 말 그대로 '동인지를 만들던 사람'으로서의 '동인녀'인 것입니다.
(이후 이 분들 중에 야오이 작품을 즐겨보는 분들도 등장하게 되지만, 그건 단순히 사람이 많이 모여 있다 보면 그 중에 야오이 팬도 있기 마련인 것으로서, 아직 PC통신이나 인터넷 등 대형 만화 커뮤니티가 없던 시절 만화를 좋아하는 '커뮤니티'로서의 역할이 만화 창작을 위한 동인서클에 집중되어 있던 시절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서, 조금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Commented by mirugi at 2006/01/28 20:37
좀 더 정확하게 말하려면 좀 더 폭넓고 대규모적인 조사가 필요할 텐데, 그런 조사나 연구가 이루어져 있지 못한 현재로서는, 아직 그 누구도 확실하게 정의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Commented at 2006/01/28 20:55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수안 at 2006/01/29 01:41
글이랑 상관 없지만 살아가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Commented by twenty at 2006/01/29 10:02
이 책을 언제 처음 읽었었더라... 저도 상당히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책입니다. 책을 읽으면서 팬픽이지만 정말 많은 사전조사와 연구가 필요했겠다... 하고 처음으로 감탄했던 책이기도 하구요. 이 분, 만화도 꽤 재미있었는데 요즘은 안 그리시는듯 해서 슬퍼요. (하긴 바쁘실테니...)
Commented by 당근 at 2006/01/29 18:04
우와아아아 이 추억의 명작을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 제본의 퀄리티와 스토리 자체의 짜임새만 보더라도, 이 책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ㅠ.ㅠb 그 시절이어서 탄생할 수 있었던 이야기라는 말씀에 정말로 공감합니다.

참,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설 연휴 즐겁게 보내세요^^
Commented by 깃쇼 at 2006/01/29 18:09
오, 저런 멋진 책이 있군요. 한 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건 그렇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6/01/30 01:50
비공개님 / 컷 감사합니다!!! 그리고 좋은 말씀도 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ㅠ_ㅠ
예 그 뒤로 여러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꼭 원작의 이야기가 아니라도 그 캐릭터들을 대상으로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 또한 버릴 수 없다고 생각되더군요. 원작에서 전하고자 하는 테마가 아니더라도 그것들은 그 나름대로 전혀 다른 매력과 가치를 지니고 있으니까요(이미 홀려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좀 더 편안하게 생각하는 법을 익혀야겠습니다 전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비공개님 2 / 못 돌아가죠.... 지금은 작가에게 돈 보태준다는 자부심이라도 있지 보따리 장사에게만 바가지 쓰던 그 시절(흑)

mirugi님 / 감사합니다 ^^ 60년대생...; 까마득합니다 으아아아. 만화계가 작고 사회적인 영향력이 없다보니 연구할 여력이 안되는 모양이네요 아무래도... 그래도 가치없는 일은 아닐텐데.

비공개 3 / 그래 그걸로 갚아라 -_-; 과연 마비에서 걸어나간 발자국이 보일 것인가?!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6/01/30 01:50
수안님 /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twenty님 / 으아아아 만화도 그리셨군요!!! ;ㅁ;
확실히 90년대 중반 팬픽들에서는 지금과는 다른 박력을 느낄 수 있어서 즐겁습니다.

당근님 / 아시는 분들이 비온 뒤 대나무싹처럼....; 멋진 책이지요. 그 옛날 한국야후경매에서 봤을 때 질렀어야 하는 건데 쳇....(...)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깃쇼님 / 기회가 되시면 보셔도 후회는 안하실 거예요 :D
즐거운 설날 되시기를!
Commented by mirugi at 2006/01/30 12:06
까마득하다고 해도, 60년대생의 동인녀 분도 지금 이글루에서 활동적으로 글쓰시고 코믹월드에도 여전히 나오시는 모 님을 비롯하여 꽤 많이 계신데요.;; 다만 그 분에게도 선배에 해당할 60년대 초반 생의 분들 중에는 만화 관련 활동을 접은 분들도 많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정리해볼 필요성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분야 (여성향 동인계)는 만화계가 아무리 커지고 사회적인 영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연구될지 어떨지는 사실 알 수 없는 것이죠. 차라리 지금보다 만화계가 더 작고 영향력이 더 없었던 시절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에도, 차라리 지금보다 동인계에 대한 기사는 더 찾아보기 쉬웠으니까요. (『르네상스』 등의 잡지에서 동인서클 탐방을 하기도 했고, ACA에서도 자체 회지를 내기도 하는 등.)
요는 그런 일을 하고 싶어하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오거 at 2006/01/30 19:18
서현아님은 이 책이 나오기 좀 전에 유유백서 해적판을 번역하셨었죠(...헤헷 사실 저 이 분 동인지도 갖고 있어요>.<)) 나중에 대원의 라이센스판이 오히려 오역과 오타가 많더군요;
1세대 동인녀라면,샐리님의 이 포스팅을 읽어보셔도 좋을지도요.
(이미 읽으셨을지도;OTL)
http://haime.egloos.com/526155
Commented by 로즈 윕 at 2006/01/30 21:45
저야 개정판 세대라 '그 당시의 유유백서'에 대해서는 주워들은 지식밖에 없습니다만;; 정말 유유백서는 동인계에 있어서는 큰 의미를 가지는 작품인 듯 합니다. 코우가 윤, 나루시마 유리 등 현재에 이름이 알려진 작가들이 이렇게나 깊게 닿아있는 작품은 세인트 세이야와 유유백서 외에 별로 들은 기억이 없을 정도니까요^^;;
그런데 서현아씨가 동인 활동 하시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네요; 높은 퀄리티의 번역을 하시는 분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런 활동도 하셨군요^^;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6/01/31 21:58
mirugi님 / 하지만 제게 있어선 역시 까마득한 선배님들로 느껴져서요.....;
결국 사람의 의지에 달린 일인가요. 우우 ㅠ_ㅠ

오거님 / 포스트 추천 감사합니다 ^^
후기에 보면 그 해적판, 결국 나오지 못했다고 되어 있던데... 현 해적판도 서현아님이 번역하신 건가요?

로즈 윕님 / 유유백서야 국내에선 동시대의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에 비해 쫌 뜨지 못한 감이 있지만, 동인계에서라면야 지지 않죠(쿨럭). 저도 한때 엄청 불타올랐었거든요. 한참 뒷북이었지만...
Commented at 2006/02/11 17:28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6/02/15 23:19
비공개님 / 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울러 답글 늦어 죄송합니다 ^^;
BL 아니예요. 고전 팬픽답게 서사와 빈틈 설정 메꾸기에 중점을 두고 있지요. 그러니 안심하시고 반드시 구해보세요 핫핫. 포스팅에 공감해주셨다니 기쁩니다.
Commented by 랄랄라 at 2006/03/01 14:50
^^지나가다가 잼난 기사가 있어서 열심히 봤네요. 재미있었던 소설이었죠.정말 설정에도 엔간히 힘쓰시고,근데 만화가 서현아님과 번역가 서현아님을 동일인물로 보시는 분이 위에 계시는 것 같아서요. 두분은 전혀 다른 분이랍니다^^그러고보니 요즘 만화가 서현아님을 참 뵙기 힘드네요.하긴 만화계가 참 힘들어서리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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