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 속으로 뛰어든 소녀만화와 그 변화에 대하여<작성자>
cinephile ( http://blog.naver.com/caline )
살아가자 ( http://tutu.egloos.com )
<목 차>
1. 머리말
2. TV 애니메이션의 태동
3. 내면에서 폭발한 소녀만화
4. 소녀만화 원작 애니메이션의 등장
5. 로맨스물의 전성기
6. 에반게리온이 부른 바람
7. 오늘날의 소녀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
8. 맺음말
1. 머리말 비록 일본 애니메이션이라는 한 장르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일본에 대한 ‘애니메이션 강국’이라는 평가는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다. 이미 전 세계에 방영되는 TV 애니메이션의 60%가 일본의 작품으로 채워져 있고, 지금껏 그다지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어놓지 못했던 극장용 애니메이션들까지도 TV 애니메이션의 압도적인 점유율을 바탕으로 하나 둘 세계시장을 노크하면서, 상업적 성과는 물론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호평을 받으며 예술성까지 인정받게 된 일본 애니메이션의 고공행진은 약간의 과장이 섞여있기는 하지만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시대적 흐름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이러한 성공은 단기간에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결과물이라기보다는 오랜 기간 동안 축척된 그들만의 탄탄한 기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더욱 고무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러한 기반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한 가지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만화라는 장르의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장르는 기본적으로 역사는 물론 제작이나 배포 방식에 있어서도 많은 차이를 지닌 별개의 장르이지만, 1963년 오늘날까지 일본 애니메이션의 아버지 혹은 일본 만화의 신으로 불리고 있는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1)가 자신의 만화 『철완 아톰(鉄腕アトム)』을 원작으로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방영한 이래 두 장르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확고한 공조체제 안에서 성장해 왔다. 특히 그러한 공조체제 중에서도 인기 있는 만화를 원작으로 하여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시스템은, 기본적인 설정이나 캐릭터 혹은 서사구조 등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내지 않고 원작의 것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원작 자체가 이미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기에 많은 제작비가 들어가는 애니메이션이 흥행에 실패할 확률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세한 환경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야 했던 제작자에게 매우 매력적인 카드였고, 덕분에 이러한 시스템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공고해지며 오늘날까지 하나의 뿌리 깊은 전통으로서 꾸준히 유지되어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만화-애니메이션 간의 공조체제가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일본 애니메이션의 발전에 크게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공통된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몇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구체적인 설명은 일단 본론으로 돌리도록 하겠다. 가장 큰 문제는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두 장르가 양립하기 위해서 주제나 소재는 물론 작화 스타일이나 연출기법 등의 많은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유사하게 가져가고, 또 그것을 오랜 시간 동안 유지함으로서 궁극적으로 두 장르에 대한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물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미 일본 애니메이션은 ‘만화 영화’라는 단어로 대치시켜도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을 만큼 만화라는 장르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이 주지의 사실인 바, 굳이 둘을 칼로 무 썰듯 완벽하게 구분하려고 하는 시도는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 장르를 만화 -> 애니메이션이라는 단선적인 구조에만 입각해서 파악하려는 것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라는 개별적인 장르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을 저하시킬 수 있다. 그뿐 아니라 만화라는 장르가 애니메이션에 비해 훨씬 적은 인력과 자본으로 제작될 수 있었던 덕분에 연령층, 성별, 소재에 있어서 매우 넓은 스펙트럼으로 발전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과 만화의 링크는 그런 만화의 다양성을 착실히 담아내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애니메이션의 구미에 맞는 어떤 ‘특화된 공통분모’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했다고 하더라도 전혀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분명 경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논문은 그러한 맥락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그 기반을 닦기 시작하는 60년대를 기점으로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어떻게 그 공조체제를 확립시키고 발전시켜 나갔는지를 살핌과 동시에, 만화라는 장르 중에서도 여성독자층을 대상으로 특화된 소녀만화2)의 형성과 그 발자취를 추적함으로서 이 공조체제가 특정한 공통분모를 제외한 나머지 요소들을 어떤 식으로 취급해왔고 또 소외시켜 왔는지를 살펴보고, 궁극적으로 거기에 어떠한 문제가 존재해왔는지 또 지금은 그러한 문제가 어떠한 방식으로 남아있고 또 해결되고 있는지를 차근차근 밝혀내보고자 한다.
2. TV 애니메이션의 태동 논의를 전개시키기에 앞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시조(始祖) 격이자 이야기의 출발점이 될 작품을 정한다면 아마도 그 주인공은 『철완 아톰(鉄腕アトム, 1963)』일 것이다. 물론 일본은 20세기 초반부터 이미 시모카와 오덴(下河凹天), 고우치 준이치(幸內純一), 키타야마 세이타로(北山背太郎) 등의 개인 작가들을 중심으로 가내수공업 형태의 애니메이션 제작이 시작되었고, 태평양 전쟁 시에는 -비록 국가주도 하에 전쟁의식을 고취시키는 것이 목적이 되기는 했지만- 『모모타로의 바다 독수리(桃太郎 海鷲, 1943)』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桃太郎 海の神兵, 1945)』3)과 같은 장편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제작되었으며, 종전 이후 50년대 후반부터는 동양의 디즈니를 표방했던 스튜디오 ‘토에이 동화(東映動画)’4)가 중심이 되어 『백사전(白蛇伝, 1958)』, 『소년 사루토비스케(少年猿飛助, 1959)』 등의 우수한 완성도를 지닌 현대적인 극장용 애니메이션들이 다수 제작되었을 정도로 일본은『철완 아톰』이 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뛰어난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기술력에 상응하는 작품들을 다수 제작할 정도로 우수한 저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963년 『철완 아톰』이 제작되기 이전의 일본 애니메이션은, 비단 앞에서 예를 든 토에이 동화의 작품만이 아니라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만큼의 작품이 대규모의 제작비와 장기간의 제작을 요하는 극장용 작품이거나, 설령 개인 혹은 소수의 인력에 의해 만들어져서 대규모 제작비를 어느 정도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한편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긴 제작기간을 전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뒤집어서 말하자면 TV 드라마처럼 하나의 타이틀을 가진 작품이 특정한 사이클을 가지고 순차적으로 방영되는 시리즈물이 애니메이션으로는 전혀 시도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우수한 기술이 있었고 그에 상응하는 뛰어난 인력들과 높은 열정까지 겸비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가, 꾸준한 경제 성장에 따라 50년대 후반에는 이미 신 3종신기의 하나로 추앙받으며 급속도록 대중화되던 TV로 그 눈을 돌리지 않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당시 모든 애니메이터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미국의 디즈니사를 롤 모델로 삼으며 구축했던 기존의 애니메이션 시스템으로서는 주 1회 30분 방영이라는 TV의 스케줄에 맞추어 신속하게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고작 한편에 50~60만 엔에 불과했던 당시의 TV 프로그램 제작비5)로는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의 유일무이한 거대 스튜디오로서 우수한 인력과 시장을 독점하며 기존의 체제에서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어들이던 토에이 동화로서도, 굳이 잘 나가고 있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버리고 TV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모험을 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그것은 현장에서 직접 제작을 하던 애니메이터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결과적으로 업계 전반에 걸쳐 애니메이션으로 TV 시리즈물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고, 가능하더라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회의적인 인식이 팽배해져 있었다.
하지만 『철완 아톰』을 제작한 ‘무시 프로덕션(虫プロダクション)’6)의 입장은 사뭇 달랐다. 대규모 자본과 인력을 지닌 토에이 동화와는 달리, 데즈카 오사무를 중심으로 소수의 애니메이터들이 규합하여 설립된 신생 스튜디오였던 무시 프로덕션은 그 규모나 기술력에서부터 이미 토에이 동화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기존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토에이와 정면 승부를 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상황이었기에 처음부터 판을 뒤엎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무시 프로덕션의 슬로건이 ‘상업성에 철저한 재미있는 작품을 만든 후 거기에서 번 돈으로 실험적인 작품을 만든다.’이었던 만큼, 데뷔작인 『어느 길모퉁이 이야기(ある街角の物語, 1962)』가 실험적인 작품이었으니 차기작은 어느 정도 상업성을 고려한 작품이 되어야 했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데즈카 오사무는 당시까지만 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TV 애니메이션에 눈을 돌렸던 것이었다.
하지만 방송이 시작된 지 10년이 넘게 시도조차 되지 않았던 TV 애니메이션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제작비 절감을 위하여 디즈니의 애니메이션과 같은 복잡하고 리얼한 움직임의 묘사는 지양하고 리미티드 기법7)과 뱅크 시스템8)을 적극 활용하여 동화매수를 줄이는 대신, 기존의 작품보다 훨씬 복잡한 세계관과 흥미로운 서사구조를 정면으로 내세웠고, 세계관과 스토리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내기보다는 이미 만화로서 연재되어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던 -게다가 영화적 연출기법의 영향으로 애니메이션화도 용이한-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을 원작으로 하여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비는 기대한 만큼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러한 상황에서 데즈카가 메이지(明治) 제과와의 스폰서 계약을 고작 편당 55만엔의 헐값에 맺어버리면서9) 상황은 더욱 어렵게 돌아갔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을 단순한 돈벌이로 바라보기보다는 자신의 오랜 염원으로 여기며 한시라도 빨리 작품을 제작하고 싶어했던 데즈카는, 거기서 발생하는 적자를 인기 만화가였던 자신의 원고료로 메우고 이후에 캐릭터 상품이나 판권 등을 통하여 보충하려는 적극성을 보이며 무모해보이는 제작에 돌입했고 갖은 마찰 끝에 종국에는 로테이션 시스템10)까지 도입하면서, 마침내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 『철완 아톰』이 1963년 1월 1일 후지TV를 통해 방영되게 된다.
이런 어려움 속에 탄생한 『철완 아톰』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첫 방영에 27.4%라는 시청률을 보인 이후 4화에서 32.7%를 기록하여 처음으로 30%를 넘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30%를 웃도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스폰서였던 메이지 제과는 그런 아톰의 캐릭터를 이용해 단번에 라이벌이었던 모리나가 제과를 누르고 업계의 선두로 떠올랐다. 하지만 『철완 아톰』 성공의 의미에는 단순한 인기 애니메이션 탄생 이상이 있었다. 우선 『철완 아톰』이 가져온 이러한 성공은 토에이를 비롯한 다른 스튜디오들을 자극하여 경쟁적으로 TV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게 만들었다. 그로 인한 TV 애니메이션 제작 편수의 꾸준한 증가는 1년에 고작 10편 남짓한 작품이 제작되던 기존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중심 시장을, 훨씬 노동 집약적인 방식을 통하여 보다 다양한 작품을 다수 배출할 수 있는 TV 애니메이션 중심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확장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와 동시에 불모지와 같았던 TV 애니메이션을 개척하기 위해 『철완 아톰』이 걸어온 발자취, 사용한 방법, 구축한 시스템들은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이라는 강한 상징성과 함께, 이후 모든 일본 TV 애니메이션이 따라야 할 하나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 결과적으로 『철완 아톰』은 향후 일본 TV 애니메이션이 나아갈 전반적인 모델-그것이 긍정적인 것이든 아니든-을 제시하는 실질적인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인기 만화를 원작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방식은 제작비용의 절감, 광고 효과, 리스크의 분산 등 여러 가지 이점이 있었기에 가장 유용한 방법론으로 각광을 받았다. 인기 만화가로서, 『철완 아톰』 외에도 애니메이션의 원작으로 활용할 작품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던 데즈카 오사무의 입장에서도 그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에, 이후에도 『정글 대제(ジャングル大帝, 1965)』 『리본의 기사(リボンの騎士, 1967)』 등 자신의 작품들을 계속해서 애니메이션화하였다. 그를 벤치마킹한 다른 스튜디오들도 요코야마 미츠테루(横山光輝), 이시노모리 쇼타로(石ノ森章太郎)와 같은 인기 만화가의 작품들을 애니메이션화함으로서, 일본 애니메이션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민담, 동화, 전설 등에서 모티브를 얻던 기존의 시스템을 벗어나 만화라는 장르를 원작으로 삼고 기본적인 세계관과 서사를 공유하는 공조 시스템을 자연스럽게 정착시켰다. 그러한 시스템은 조금은 애매모호한 ‘TV망가(TVまんが)’라는 신조어와 함께 향후 일본 애니메이션의 가파른 상승세를 이끄는 새로운 추진력으로 자리잡게 된다.
3. 내면에서 폭발한 소녀만화 논의의 핵심으로 돌아가서, 일본 애니메이션이 『철완 아톰』 이후 이렇듯 철저한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을 때 소녀만화는 과연 어떠한 역할을 하였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다지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확한 평가일 것이다. 물론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은 『마법사 샐리(魔法使いサリ-, 1966)』라는 작품을 통해 이미 60년대 후반부터 스타트를 끊었고 그 이후에도 『리본의 기사(リボンの騎士, 1967)』나 『비밀의 아코짱(ひみつのアッコちゃん, 1969)』 같은 작품들이 꾸준히 등장하면서 나름대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양으로 보았을 때 당시 주류였던 아동/소년 만화가 『철완 아톰』을 필두로 『철인 28호(鉄人28号, 1963)』,『에이트맨(エイトマン, 1963)』,『빅X(ビックX, 1964)』,『정글 대제(ジャングル大帝, 1965)』,『오소마츠군(おそ松くん, 1966)』,『꽃의 퓽퓽마루(花のピュンピュン丸, 1967)』, 『타이거 마스크(タイガ─マスク, 1969)』 등 수많은 작품들의 원작으로 활용되었던 것에 비한다면, 이들이 60년대 제작된 TV 애니메이션들 사이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훨씬 저조한 수치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런 수치적인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이 당시 애니메이션의 원작으로 활용되었던 소녀만화들은 대부분 주인공이 소녀였고 그에 따라 핵심 독자들도 소녀계층이었다는 점에서 포괄적인 소녀만화의 범주에 들어갈 뿐, 당시의 주류였던 아동/소년 만화와 차별화된 특성을 지닌 독립된 장르로서의 성격을 거의 가지지 못하였다. 실제로 앞서 예로 든 작품의 원작들도, 아동/소년만화를 그리던 당시의 주류 남성 작가들이 ‘소녀들에게도 만화가 필요하다’라는 인식 하에 부수적으로 그려낸 아동/소년만화의 연장 혹은 변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물론 또다른 곳에서는 이미 50년대부터 미즈노 히데코(水野英子), 다카하시 마코토(高橋真琴), 와타나베 마사코(わたなべまさこ)와 같은 여성 작가들을 중심으로 소녀만화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싹트고 있기는 했지만, 그 역시도 모성과 화목한 가정 그리고 멜로적인 감성을 중시하는 획일화된 소재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로 진화의 한 과정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당시 일본의 소녀만화는 소년/소녀의 구분이 불명확했던 전후 아동만화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지도 못했거나, 확립했더라도 아직은 걸음마 단계에 불과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냉정한 평가일 것이다.
소녀만화가 애니메이션과 만화라는 장르 간의 커넥션 구축에 어느 정도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가를 따지기 전에, 당시로선 기존의 만화에서 ‘소녀만화’라는 것을 독립적인 장르로 구분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그 기준이 모호했다. 아직 태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장르가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그런 시대적인 한계를 뒤로 하고, 일본의 소녀만화가 실질적인 진화 - 즉 편협한 소재라는 한계와 아동/소년만화의 영향력을 벗어나서 독자적인 기법과 스타일을 발전시키며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 자립하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쇼와 24년조(昭和24年組)’11)라고 불리던 여성만화작가군(群)에 의해서였다. 데즈카 오사무와 그의 소년만화를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던 기존 만화의 문법들을 거부하면서, 소년만화는 물론 그때까지의 소녀만화와도 차별화된 새로운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하여 궁극적으로 70년대 소녀만화의 극적인 진화를 이끌었던 그녀들의 혁명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일까? 이견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바로 ‘내면’이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데즈카 오사무가 확립한 전후 일본 만화의 연출 문법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 영화광이며 처음부터 애니메이션 제작을 염두에 두고 만화를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 데즈카는, 2차원 평면에 불과했던 만화에 속도감과 입체감을 부여하기 위해서 영화의 연출 문법들을 대거 차용해서 만화를 그렸으며 그를 통하여 자신의 만화를 손쉽게 애니메이션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후 만화사(史)를 다시 쓰게 만든 데즈카의 획기적인 시도는,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그림’과 ‘글’이라는 만화의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 구성요소 중에서 전자에 훨씬 더 높은 비중을 두는 일본 소년 만화의 전통으로 이어졌다. 당시 만화에 있어서 문자가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란 몇몇 의성어와 의태어, 말칸에 의해 표현되는 캐릭터의 대사와 짧은 독백 정도가 전부였고, 캐릭터의 심리를 표현하는 것은 정형화 된 표정이나 땀방울 같은 기호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당시 일본만화의 기법은 겉으로 드러나는 액션이나 캐릭터의 극적인 감정변화는 비교적 손쉽게 묘사할 수 있었던 반면,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캐릭터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나 차분한 독백과 같은 부분을 묘사하는 데에는 큰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당시의 일본 만화와 그런 만화에 기반을 둔 애니메이션은, 기존의 연출 문법 속에서 화려한 시각적인 볼거리를 손쉽게 제공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생생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캐릭터의 깊이 있는 내면을 묘사하는 데에는 취약성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쇼와 24년조의 작가들은 말칸 안의 음성화된 대사와 차별화되는 말칸 밖의 대사를 사용함으로서 주인공의 내면을 훨씬 더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새로운 기법을 마련했다.12) 그것은 마음속의 대사일 수도 있고, 화자의 독백일 수도 있고, 편지 등 다른 텍스트의 인용일 수도 있고, 주제를 강조하는 시의 한구절일 수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이제 만화가 이러한 방식을 통해 다양한 층위의 의식과 대사를 한 화면에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졌으며, 그를 통해 훨씬 더 깊이있는 캐릭터의 내면을 묘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내면을 향한 70년대 소녀만화의 혁명은 만화의 또다른 구성요소인 ‘칸’에서도 나타났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 만화의 칸은 수평과 수직의 축을 기본으로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기 위해서 특정한 규칙과 패턴을 가지고 분배되었다. 그러나 쇼와 24년조는 그러한 기존의 문법에 반기를 들고 칸의 중복, 변형 등으로 캐릭터의 내면을 표현하는 이질적인 칸 배분방식을 도입하였다.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기 위해 쓰이던 칸의 규칙과 약속은 파괴되었고, 겹쳐져서 그려진 칸들은 시간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내면의 독백이나 회상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쓰였다. 이러한 칸 배분의 해체는 조형적인 아름다움 추구, 시선의 분산 또는 인물의 섬세한 감정선을 연출하는 데에 효과적이었다.13)
그러나 70년대 소녀만화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은 단순히 연출기법의 발전이라는 단편적인 변화에 머물지 않았다. 이러한 연출기법의 발전은 전통적인 소년만화식 표현에 종속된다는 굴레를 끊었고, 그 속에서 부여받았던 가족애, 모성, 로맨스라는 편협한 소재와 수동적인 정체성을 벗어나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소재를 새롭고 신선한 방식으로 소화해내는 ‘내용’의 변화를 이끌어내면서 내용과 형식 어느 한쪽 면에 치우치지 않는 총체적인 소녀만화의 성장을 야기하였다. 게다가 당시 경제성장과 함께 일어난 페미니즘의 바람, 여성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던 사회적인 분위기와 결합하면서, 종국에는 만화라는 장르 속에서 지금껏 ‘타자’의 위치에만 머물렀던 ‘자신’을 극복하고 소녀만화의 생산과 소비의 주체로서의 ‘소녀’, 궁극적으로 ‘여성’을 자각하는 계기로까지 이어졌다.
문자라는 소외된 구성요소에 대한 새로운 접근에서 출발한 70년대, 쇼와 24년조의 조용한 혁명은 소녀만화계 아니 전후 만화사에 새로운 조류라고 할 만한 캐릭터의 ‘내면’을 발견하고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소녀만화는 소녀들의 판타지가 아니라 소녀들의 이야기, 감성, 심리 궁극적으로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새로운 양식으로서 진화하는데 성공했고, 소녀만화는 바로 그러한 성공을 기점으로 독자적인 특징과 정체성을 확립시키며 기존의 모호한 장르적 정체성을 벗어나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 분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소녀만화 원작 애니메이션의 등장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소녀만화는 70년대에 내면이라는 신대륙을 발견함으로서 괄목할 만한 진화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그러한 진화는 만화라는 장르 내부에서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지 못했던 소녀만화라는 장르가 기존의 소년만화와 차별화된 정체성을 가진 독립적인 장르로서 자리매김하도록 이끌었다. 하지만 그런 뚜렷한 정체성의 확립도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속의 소녀만화가 확고한 위치를 보장받도록 해주지는 못하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히려 그것이 소녀만화가 애니메이션과 접합하는 데에 장애물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의 제작 시스템은 이미 60년대에 『철완 아톰』을 애니메이션화하면서 데즈카가 구축해놓은 영화적 연출->소년만화->애니메이션이라는 구조에 크게 의존한 채로 고착화되던 중이었던 반면, 당시 소녀만화가 들고 왔던 새로운 방법론은 그러한 시스템에 맞춰 특화된 소년만화식 연출문법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성격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기존의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으로 소녀만화의 특성을 끌어안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러한 소녀만화의 특성을 애니메이션으로 고스란히 옮겨놓기 위해서는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기존의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 자체를 뜯어 고치는 것이 가장 유효한 방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만화와는 달리 다수의 스텝과 대규모 자본을 투입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애니메이션계로서는 그런 거대한 구조를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었고 설령 가능하다 해도 소년만화만으로도 애니메이션에 필요한 모티브들을 충분히 제공받으며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던 상황에서 굳이 수익성도 불확실한 소녀만화를 위해서 무리한 모험을 시도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와중에서도, 소수이긴 하지만 70년대 초반부터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이스를 노려라(エースをねらえ, 1973)』의 경우 딱히 소녀만화로서의 자각이 있었다기보다는, 비슷한 케이스인 『어택 No.1(アタックNo.1, 1969)』과 함께 『거인의 별(巨人の星, 1968)』, 『내일의 죠(あしたのジョ─, 1970)』로 이어지는 열혈 스포츠 애니메이션의 계보 속에 위치하는 작품에 가까웠다. 『큐티하니(キュ-ティ-ハニ-, 1973)』나 『라세느의 별(ラ․セ-ヌの星, 1975)』 역시도 여성 히어로물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더 강해보였을 정도로, 70년대 중반까지 일본 애니메이션에 있어 쇼와 24년조의 혁명이 불러온 새로운 소녀만화는 그다지 매력적인 모티브를 제공해 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70년대 소녀만화의 흐름을 계승한다는 측면에서는 이케다 리요코의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ベルサイユのばら)』, 『오르페우스의 창(オルフェウスの窓)』등을 컨버전했던 타카라즈카(宝塚)14)라는 연극이 더욱 소녀만화 친화적이었다.
이러한 흐름에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70년대 후반이었다. 1976년,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이가라시 유미코(いがらしゆみこ)의 『캔디 캔디(キャンディ․キャンディ, 1976)』가 방영되어 높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이후, 비록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하지 않은 오리지널 기획 작품이기는 했지만 비슷한 노선을 걸었던 『새싹 샬롯(若草のシャルロット,1977)』과 『여왕폐하의 프티안제(女王陛下のプティアンジェ, 1977)』가 잇달아 방영되었고, 이듬해에는 일본 개화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물 『하이카라상이 지나간다(はいからさんが通る, 1978)』가 애니메이션화되었다.
하지만 소녀만화 원작 애니메이션들의 결정적인 주춧돌이 된 작품은 바로 『베르사이유의 장미(ベルサイユのばら, 1979)』였다. 72년에 연재를 시작하여 73년에 연재를 마친 이 작품이 무려 6년 후인 79년에서야 애니메이션화될 수 있었던 것은 74년 타카라즈카로 컨버젼되어 전국 140만 관객을 동원하는 경이로운 인기를 얻으면서 이미 월등한 상업성을 검증받았기 때문이었지만, 당대 최고의 인기 소녀만화가이자 쇼와 24년조의 대표주자인 이케다 리요코(池田理代子)의 작품을 원작으로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남달랐다. 작품 자체도 -비록 작화감독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마찰이 있기는 했지만- 당대 최고의 미형 캐릭터 디자이너로 유명한 아라키 신고(荒木伸五)를 작화감독으로 섭외하여 원작의 분위기를 최대한 살려내었고, 나가하마 타다오(長浜忠夫)의 뒤를 이어 19화부터 감독을 맡은 데자키 오사무(出崎統)가 아니메의 영상시인이라는 세간의 평판이 허명이 아님을 증명하며 프랑스 혁명 당시의 화려한 궁정 귀족사회와 여주인공 오스칼의 드라마틱한 삶을 큰 가감없이 브라운관으로 옮겨놓았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아쉬운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완성도도 높았고 상업적인 성공도 거두었으며 원작자의 의도 역시 충분히 반영된 이 작품으로 인해 일본 애니메이션은 70년대 소녀만화가 거두어들인 새로운 성과를 받아들이며 80년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시대는 여러모로 유리했다. 6,70년대에 TV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자란 세대들의 성장, 『우주전함 야마토(宇宙戦艦ヤマト, 1974)』와 『기동전사 건담(起動戦士ガンダム, 1979)』이라는 전설적인 두 작품의 등장, 83년 OVA15)의 탄생, 버블 경기로 대변되는 일본 역사상 최고의 경제적 호황기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면서 등장한 80년대의 애니메이션의 붐은 가파른 양적 질적 성장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요구하고 있었다. 소녀만화는 그 모든 것을 채워줄 수는 없을 망정 하나의 대안으로서 충분히 유용했다.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그런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이가라시 유미코(いがらしゆみこ)의 『레이디 제니(レディジョ-ジ, 1982)』, 미우치 스즈에(美内すずえ)의 『유리가면(ガラスの仮面, 1984)』, 아카이시 미치요(赤石路代)의 『불꽃의 알펜로제 쥬디&랑디(炎のアルペンロ-ゼ ジュディ&ランディ, 1985)』, 하기오 모토(萩尾望都)의 『11명 있다(11人ある, 1986)』, 타케미야 케이코(竹宮惠子)의 『지구로…(地球へ, 1980)』와 『바람과 나무의 시(風と木の詩, 1987)』, 코가 윤(高河ゆん)의 『지구인(ア-シアン, 1989)』에 이르기까지 70년대 소녀만화의 발견을 공유하는 많은 소녀만화들이 애니메이션화 되었다. 비록 그들 모두가 모든 면에서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예의 발견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긍정적이었다. 특히 『바람과 나무의 시』의 오프닝을 장식한, 세르주의 독백처럼 보이는 시(詩)는 70년대 쇼와 24년조가 그리고 소녀만화가 발견했던 ‘내면’의 충실한 반영이었다.
그러나 80년대 제작된 소녀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들이 전체적으로 긍정적이었다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분명 여러 가지 한계점을 내포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한 한계점은 중층적인 것이었다. 우선적으로 그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건 단순한 수치상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다양한 모티브를 얻기 위한 여러 수단 중 하나였기에, 뚜렷한 성과를 남기지 못하면 언제든지 시행착오로 귀결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실제로 소녀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은 투입된 노력과 그에 상응하는 완성도에 비해 경제적 성과는 미미했다. 유래가 없었던 경제적 호황기가 일시적으로 그런 문제를 덮어줄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원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바로 ‘단절’이었다. 그들 대다수가 작품의 완성도나 예술적인 면에 있어 개별적으로는 나름 만족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성과를 ‘소녀만화 원작 애니메이션’이라는 상위 카테고리에서 서로 공유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소녀만화 원작으로 작품을 제작한 스텝들이 또다시 유사한 작품에 손을 대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단편적인 예이긴 하지만 『유리가면』을 감독한 스기이 기사부로(杉井ギサブロ)나 『바람과 나무의 시』를 감독한 야스히코 요시카즈(安彦良和)는 원래부터 소녀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과 무관한 필로그래피를 가진 인물이었고 이후에도 그런 작품의 감독을 맡지 않았다. 『지구인』의 감독 코카와 요리야스(古川順康)의 경우, 작화 스타일에서 소녀만화와 어느 정도 연관을 지닌 『다크 사이드 블루스(ダークサイドブルース, 1994)』를 후에 감독하기는 하지만 애초부터 『투사 고디안(鬪士ゴ-ディアン, 1979)』나, 『황금전사 골드 라이탄(黃金戦士ゴ-ルドライタン, 1981)』같은 로봇 애니메이션에 주로 참여한 인물이었고 이후에도 『에이트 맨 AFTER(エイトマン AFTER, 1993)』 『철인 28호(鉄人28号, 2004)』 등과 같은 소년 취향의 작품에 훨씬 많이 참여했다. 심지어 『지구로…』를 감독한 온지 히데오(恩地日出夫) 감독은 원래 극영화 출신이기까지 했다. 그나마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감독 데자키 오사무가 예외적인 케이스로, 그 계보를 잇는 『오빠에게(おにいさまへ, 1993)』를 15년 가까이 지난 후에 제작하였고 당 작품에서 작화감독을 맡았던 데자키의 명콤비 스기노 아키오(杉野昭夫)가 『11명 있다!』의 캐릭터 디자인을 담당했던 정도가 연속성의 전부였다. 70년대까지 소급하면 이들이 『에이스를 노려라』에서도 콤비를 이룬 적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소녀만화 원작 애니메이션들 사이에 남겨진 단절의 흐름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그들에게 있어서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은 흥미로운 모험이자 새로운 시도, 혹은 자신들의 다양한 경력 속의 한 부분일 수는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처음부터 그들의 자리가 아니었고 그것을 꾸준히 이어나가야 할 목적의식도, 그런 목적의식을 유발할 만한 동기도 부족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곳을 떠나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고 실제로 대부분이 그러했다. 늘어난 시장이 보장해주는 다양한 기회는 그것을 조장했다. 엄청난 성공사례이긴 하지만 『기동전사 건담』의 창시자인 토미노 요시유키(富野由悠季)가 이미 오래 전부터 로봇 애니메이션의 전문가였고, 당시는 물론 이후에도 꾸준히 건담은 물론 로봇 애니메이션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어왔던 것과는 확실히 대조적이었다. 그가 창시해 낸 리얼 로봇물이라는 장르의 성과물을 상당수의 애니메이터들이 공유하며 진화와 발전을 거듭해온 결과 오늘날까지도 그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80년대 제작된 소녀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은 그렇지 못했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5. 로맨스물의 전성기 8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 시장이 엄청난 양적 팽창을 맞이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전체적인 시장 규모의 증가였지 그것이 개별적인 스튜디오의 수입을 늘려주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전체적인 시장의 증가에 비해 더 많은 제작편수의 증가가 이루어졌고, 늘어난 수요에 그를 초과하는 공급이 이루어지면서 애니메이션 자체의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루어내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취약한 자본구조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의 영세성은 데즈카 오사무 시절 그대로였다.
그런 문제를 정면으로 노출한 것은 90년대였다. 80년대의 가파른 성장세 속에 정점에 올랐던 일본 애니메이션이 80년대 후반 버블경기의 붕괴와 함께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들인 두 극장용 애니메이션 『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王立宇宙軍オネアミスの翼, 1987)』와 『아키라(アキラ, 1988)』의 흥행 참패는 그러한 흐름을 더욱 가속화시켰고, 결국 90년대 초 일본 애니메이션은 80년대의 역동성과 극명히 대비되는 정체의 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정체된 시장에서 취약한 자본구조를 지닌 스튜디오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했던 것은 바로 최대한 리스크를 줄이는 일이었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았다. 아니, 성공을 보장받지 못한 시도들이 용납되지 않았다는 말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이 시기의 제작자들은 크지만 위험부담이 있는 수익보다는 작지만 안정적인 수익을 원했고, 그것은 일본 애니메이션을 실험적이고 다양한 시도라는 80년대의 에피스테메에서 통속성과 획일화가 강조되는 90년대의 에피스테메로 이행시켰다. 소재의 확장조차도, 소녀만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장르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소재를 얻었던 과거와는 달리 기존 애니메이션 내부에서 어느 정도 그 유용성을 인정받은 소재들을 적당히 조합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에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둔 『미소녀전사 세일러문(美少女戦士セ-ラ-ム-ン, 1992)』은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거의 완벽하게 대변하는 작품이었다. 이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10대 소녀를 주인공으로 하여 여성들의 데포로메 욕구를 반영한 ‘변신’이라는 속성을 가미시키고 그를 통해 일상의 자잘한 에피소드들을 해결하는 변신 소녀물의 계보에 위치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세일러복이라는 패티쉬적인 복장, 각기 다양한 개성을 지닌 5~10명의 캐릭터들이 그룹을 지어 적을 물리친다는 전대물의 포맷, SF적인 설정 등 남성시청자들에게 어필할 만한 요소들도 충분한 작품이었고, 실제로 여성 못지않게 남성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정체된 시장 안에서 놀라운 상업적 성공을 얻어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제작된 대다수 애니메이션들이 공유하던 방향성이었다.
그러한 흐름은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에서도 유사하게 나타났다. 소녀만화의 애니메이션화가 기존의 소년만화와는 다른 시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완전히 폐기된 것은 아니었기에 『오빠에게(おにいさまへ, 1993)』나 『나의 지구를 지켜줘(ぼくの地球を守って, 1994)』와 같은 예외적인 작품도 분명 있었지만, 『여기는 그린우드(ここはグリンウッド, 1991)』, 『핸섬한 그녀(ハンサムな彼女, 1992)』, 『꼬마 멋쟁이는 최고(お酒落小僧は花マルッ, 1993)』, 『마멀레이드 보이(ママレ-ド ボ-イ, 1994)』, 『내 남자친구 이야기(ご近所物語, 1995)』 『아이들의 장난감(ごどものおもちゃ, 1996)』 『꽃보다 남자(花より男, 1996)』 등등, 90년대를 기점으로 제작되기 시작한 소녀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은 연애와 사랑, 그리고 여성들의 판타지를 다룬 로맨스물이 주류였다.
이는 80년대를 거치는 도중 소녀만화들의 장르가 세분화되면서 장르의 한 분파로 이러한 로맨스물이 성행하게 된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핵심적으로 고려된 것은 여성 애니메이션 팬들의 구매력이었다. 전체적인 애니메이션 팬 중에서 여성팬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저 소녀만화를 애니메이션화하는 것만으로는 적절한 수익을 보장받기 힘들었다. 하지만 로맨스라는 코드는 기본적으로 소녀만화의 주된 코드였긴 해도 이미 80년대 후반 『변덕쟁이 오렌지로드(きまぐれオレンジ☆ロード, 1987)』가 큰 성공을 거두었던 것을 볼 때 남성들 역시도 연애나 사랑 이야기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것이 증명되어 있었고 그렇기에 그러한 소재를 잘만 사용한다면 양성 모두의 구매력을 끌어안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작용한 덕분이었다. 소녀만화와 소년만화 양측의 코드를 절묘하게 조합하며 인기를 끌었던 여성 만화가 집단 클램프(CLAMP)의 작품이 이 시기에 매우 빈번히 애니메이션화 될 수 있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기본적으로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경우에 따라선 이렇게 특정한 소재에만 의존하는 방식이 불러올 획일성을 지적할 수 있겠지만, 어차피 상업적인 문제로 인해 애니메이션화 될 수 있는 작품이 한정될 수밖에 없다면 그런 방식으로나마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의 흐름을 이어나가면서 소녀만화 원작 애니메이션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경우에는 80년대 ‘단절’의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최선에 가까웠다.
하지만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비록 로맨스가 중심이 되긴 했지만 과거와 달리 소녀만화가 일정한 연속성을 가진 채 애니메이션이 되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에는, 그러한 애니메이션들이 원작을 제대로 옮겨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만화들이 애니메이션화 되면서 생길 수 있었던 평범한 이질감과는 달랐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로맨스물을 만들기 위해 원작의 캐릭터와 설정을 빌려왔을 뿐 작품 자체가 소녀만화라는 자각이 부족했다. 원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년만화를 중심으로 구축된 일본 애니메이션의 전통적인 제작 시스템의 문제였다. 물론 그러한 시스템은 비단 90년대만이 아니라 어느 시대라도 마찬가지였지만 당시는 여러 복잡한 상황이 맞물리면서 그러한 소년만화-애니메이션의 구조가 어느 때보다 경직화되어 있었다.
소녀만화 특유의 작화 스타일과 소년만화를 중심으로 특화된 제작 현장의 차이로 인해 원작과 애니메이션의 작화 사이에 큰 괴리감이 있었던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바로 ‘내면’의 반영이었다. 아무리 로맨스가 중심소재였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소녀만화였고, 그러한 소녀만화는 -설령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해도- 상당수가 그 로맨스의 중심에 서 있는 주인공 혹은 주변의 캐릭터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내면을 충실히 그려내려고 했다. 그러나 훨씬 외향적이고 동적인 리듬을 지닌 소년만화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오던 애니메이션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작품의 리듬을 끊어버리는 불필요한 요소였으며, 불안정한 수익구조 속에서 최대한 리스크를 줄여야 했던 애니메이터들로선 위험을 감수하며 그 차이를 애니메이션에 담아내야 할 필요도 여유도 없었다.
그 결과 소녀만화의 애니메이션화 과정에는 많든 적든 내면에 대한 축출이 이루어졌다. 정말 중요한 몇몇 부분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작품을 구성하는 진지한 내면 반영의 상당수가 가볍고 활기찬 개그나 동적인 화면으로 대치되었고 10대 사춘기 소년 소녀의 서정성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캐릭터 간의 로맨스가 더욱 강조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아이들의 장난감(ごどものおもちゃ, 1996)』이란 작품은, 쾌활한 십대 소녀 사나의 유쾌한 로맨스 코미디는 멋지게 연출해 내었지만 원작이 가지고 있던 사춘기 소녀 사나의 고민과 성장, 서정성 등은 그다지 성공적으로 담아내지 못했다. 그것은 그때까지 줄곧 유쾌한 개그 중심의 작품들을 전문으로 연출해오던 감독 다이치 아키타로우(大地丙太郎)의 한계이자 전반적인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의 한계이기도 했다.
결국, 이 시기의 소녀만화는 낮은 리스크와 안정된 수익을 요구하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남녀 양측의 구매력을 끌어안을 수 있는 로맨스라는 코드를 중심으로 기존의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과 유기적으로 결합함으로서 애니메이션화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했다.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 시기의 소녀만화 원작 애니메이션이 80년대의 유산과 단절함에 따라서 소년만화 중심으로 고착되어 가던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 내부의 소녀만화에 대한 몰이해가 더욱 심화되었고, 그 결과 70년대 쇼와 24년조가 발견한 ‘내면’을 그다지 효과적으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볼 때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소녀만화가 소녀만화일 수 있는 핵심적인 부분들을 상실하는 것, 그것은 분명 치명적인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그 누구를 원망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잘못이기 이전에, 과거의 여러 시도와 성공 속에서도 소녀만화의 특성을 애니메이션 내부에 정착시키지 못한 소녀만화 자신들의 잘못이었기 때문이었다.
6. 에반게리온이 부른 바람 90년대 초반에 불어닥친 일본 애니메이션의 불황은 9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애니메이션 내부의 다양한 소재와 장르적 특성을 끌어안는 퓨전적인 작품들로 소재의 고갈과 시장의 정체를 커버하고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이 시기의 애니메이션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예술적 기지를 발휘한 작품보다는 특정한 시스템에 안주하는 획일화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었기에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자체는 서서히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새롭게 등장한 비디오 게임이라는 난적은 어렵게 유지해오던 기존 애니메이션의 시장마저도 잠식해갔고, 일각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몰락론’이 오고갈 정도로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세기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 1995)』이란 작품이 등장했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훨씬 이전부터 일본 애니메이션 내부에 존재했던 거대로봇, 복잡하고 세부적인 SF적 설정,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소년의 성장 등의 통속적인 코드를 조합하고 재배치했다는 점에서 90년대 성행했던 소재확장 방식의 연장이었지만, 단순히 그런 퓨전의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이 의도된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존재하지만, 당시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복고적이고 통속적인 것을 되돌려 놓으면서도 무언가 새롭고 독특한 것을 끌어낸 것처럼 보였으며, 기존 애니메이션들의 문법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특정한 계보에 놓기엔 어려운 새로운 작품으로 보였다. 반응은 뜨거웠다. 처음에는 인기 애니메이션의 마지노선격인 5%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입소문을 타면서 시청률은 꾸준히 상승했고, 후반부에 들어 23화 6.9%, 24화 6%, 25화 7.7%, 26화 10.3%에 달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게다가 종영 후에도 인기가 시들지 않아 심야 시간대를 통하여 재방영되었으며, 97년에는 부족한 제작비 때문에 조금은 허무하게 마무리된 작품의 마지막을 보충하는 극장용 애니메이션 두 편이 제작되어 총 25억 엔에 달하는 높은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란 작품의 독자적인 성공이 아니었다. 과연 이 작품에 전적으로 의존한 현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확실한 것은 이 작품이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한 시점16)을 기준으로 전체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의 팬층이 급증하고 시장규모가 성장하는 애니메이션 붐을 맞이했다는 점이었다. 그 증거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당장 96년 후반부터 오리지널 기획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심야 애니메이션이 활성화되기 시작했고17) 그 이듬해에는 위성방송인 WOWOW를 통해 논 스크램블18) 애니메이션 방송이 시작 되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당시 각 TV 방송국에 편성된 애니메이션 방영 시간대만으로 부족할 만큼 당시 TV 애니메이션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고 그에 따른 공급의 증가도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시기, 극장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 감독의 최신작 『모노노케 히메(もののけ姫, 1997)』가 1300만에 달하는 관객을 동원하며 113억 엔이라는 기록적인 수치의 수익을 올렸으며, 이듬해에는 『포켓 몬스터: 뮤츠의 역습(ポケットモンスタ-: ミュウウツ-の逆襲, 1998)』이 아동용 작품이 거둘 수 있는 흥행선의 최대로 알려져 있던 20억 엔을 넘으며 무려 41억 5천만 엔의 수익을 올리게 된다. 바야흐로 80년대의 호황기에 필적할만한, 제 2차 애니메이션 붐이라는 성장기가 찾아 온 것이었다.
이러한 전체적인 시장 규모의 상승은 애니메이션 자체의 진화를 유발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필두로 『천공의 에스카플로네(天空のエスカフロ-ネ, 1996)』, 『기동전함 나데시코(機動戦艦ナデシコ, 1996)』, 『소녀혁명 우테나(少女革命ウテナ, 1997)』, 『카우보이 비밥(カウボ-イビバップ, 1998)』, 『무한의 리바이어스(無限のリヴァイアス, 1999)』 등과 같이, 지금껏 볼 수 없었던 독특한 스타일과 실험성을 가지면서도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를 갖춘 -『에반게리온』의 흐름을 계승하는- 작품들이 꾸준히 등장하면서 애니메이션의 질적 변화를 주도했다. 뿐만 아니라 인기작품의 재방영 수준에 머물렀던 심야 애니메이션들 사이에서도, 기존의 TV 애니메이션보다 훨씬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다는 이점을 최대한 살려 『멋지다 마사루(すごいよ!まさるさん, 1998)』, 『엑셀♡사가(エクセル♡サ-ガ, 1999)』 등 극도로 마니아적인 작품이 방영되거나, 종래의 TV 애니메이션과 다른 새로운 수익모델19)에 의해서 『Serial Experiment Lain(1998)』, 『펫숍 오브 호러즈(Pet shop of Horrors, 1999)』, 『아르젠토 소마(アルジェントソ-マ, 2000)』처럼 높은 퀄리티와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를 지닌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들이 방영되었다. 여러모로 80년대의 황금기와 비견할 만했지만 확실한건 그보다 더 넓고 다양한 방식으로 애니메이션이란 장르 전반에 걸쳐 총체적인 스타일의 확장이 시도되었다는 점이었다.
이것은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에도 호재로 작용했다. 『클램프 학원탐정단(CLAMP學園探偵團, 1997)』이나 『환상게임(ふしぎ遊戱, 1997)』 같이 대중적 인기를 끌고 양성 모두의 구매력을 끌어안을 만한 작품이 애니메이션화 되는 과거의 흐름이 끊긴 것은 아니나, 전체적인 시장 규모의 상승과 애니메이션 전반에 불어닥친 스타일의 확장은 여성 팬들의 상대적인 구매력의 상승과 함께 『팔운성(八雲立つ, 1997)』, 『바사라(BASARA, 1998)』, 『화소의 달-추광언(火宵の月 -秋狂言, 1998)』과 같이 나름대로 원작 소녀만화에 대해 신중한 접근을 시도한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들이 등장하도록 유도했다. 또, 비록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여성 시청자가 미남 캐릭터를 시각적으로 캐릭터별로 즐기며 소비하도록 의도한 『바이스 크로이츠(クヴァイス ロイツ, 1998)』 같은 작품이 등장한 이후, 『최유기(最遊記, 1999)』,『어둠의 후예(闇の末裔, 2000)』,『그라비테이션(グラビテ-ション, 2000)』과 같은 소녀만화 원작의 작품들이 소녀만화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함께 미형 남성 캐릭터를 소비하는 코드를 가지고 있었을 정도로, 애니메이션은 부쩍 여성 팬층을 의식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한 작품들이 하나 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가장 눈길을 끈 작품은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彼と彼女の事情, 1998)』이었다.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엄청난 상업적 성과를 거둔 안노 히데아키(庵野秀明) 감독과 그 산하의 스튜디오인 GAINAX의 후속 TV 시리즈였지만, 츠다 마사미(津田雅美)가 월간 순정지 「LaLa」에서 연재하고 있었던 동명의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전작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시작은 준수했다. 원작이 가지고 있던 학원 로맨스물의 포맷 위에, 이런 스타일의 작품에 의례적으로 들어가는 개그와 액션 그리고 주연 캐릭터들의 재빠른 대사들을 첨가하면서도 작품 전체의 분위기가 통속적이지 않았다. 뜬금없이 등장하는 만화풍의 화면 역시 원작의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큰 이질감 없이 애니메이션에 녹아들어가 있었고, 정적인 화면을 기반으로 한 연출들은 독특하면서도 작품의 컨셉과 딱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보여주었던 캐릭터의 내면묘사를 한층 더 발전시켜 원작이 보여주었던 캐릭터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묘사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기존의 시스템 위에서 통속적인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원작이 소녀만화라는 사실을 충분히 자각하고, 그 특성과 매력을 십분 이해한 후 애니메이션으로 옮기고자 노력한 결과였다.
하지만 곧이어 문제점이 튀어나왔다. 후반부로 갈수록 작품의 퀄리티가 눈에 띄게 떨어졌다. 장기간에 걸쳐 여러 편을 연출하는 TV 애니메이션이 회를 거듭하면 할수록 퀄리티가 하락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지만 이것은 그런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 있었다. 무엇보다 정지된 화면의 비율이 늘어났다. 물론 그것은 소녀만화를 애니메이션화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기도 했지만, 어느 시점부터 그러한 장면이 필요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작품 초반부에서 보여 주었던 정적인 화면과 동적인 화면의 적절한 조화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작품의 재미는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개그 시퀀스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원작 만화를 그대로 가져다 쓰거나 지나간 에피소드를 빠른 속도로 재생해서 한 에피소드를 때우는 경우까지 발생했고, 실험적인 성격도 강해져서 원작의 대사를 성우가 그대로 읽는 가운데 화면에서 상징적인 그림 몇 장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내면의 묘사를 때우면서 점점 난잡해졌다. 심지어 종래의 상업 애니메이션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드로잉 온페이퍼 애니메이션(Drawing On Paper Animation)’으로 한 에피소드를 연출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것은 나름대로 실험적인 시도일 수 있었지만, 시청자들의 입장에서 볼 땐 제작비 절감을 위한 리미티드 기법의 과도한 폭주로 보였고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작품에 대한 평가도 낮아졌다.
왜 이렇게 갑작스럽게 작품의 완성도가 추락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확실한 원인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다만 이 작품을 감독했던 안노 히데아키가 여러 복잡한 문제로 중도 하차했고 그 과정에서 30대의 젊은 스텝들이 작품 제작의 중추를 담당하면서 경험부족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설과, 소녀만화를 애니메이션화하는 것에 차별화된 방법론을 만들고자 했던 스텝들의 의지가 의욕만큼의 결과를 낳지 못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지만, 둘 다 하나의 가설일 뿐 중요한 것은 결과였다. 소녀만화를 애니메이션화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분명 부분적인 성과가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실패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시청자들에게 그렇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나마 거두어들인 성과마저도 폐기될 상황이었다. 최악의 경우 80년대와 유사한 ‘단절’이 또 한번 발생할지도 모를 위기상황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약간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이란 작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비슷한 스타일의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후르츠 바스켓(フルーツバスケット, 2001)』이었다. 캐릭터의 성격이나 작품의 테마는 달랐지만,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주인공과 주변 캐릭터의 내면의 갈등과 성장을 다루면서 중간 중간 개그 시퀀스를 넣는 작품의 전체적인 포맷은 유사했다. 게다가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의 감독이 바로 『아이들의 장난감(こどものおもちゃ, 1996)』을 감독했던 다이치 아키타로우(大地丙太郎)였다는 점이었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아이들의 장난감』을 재미있고 유쾌한 로맨스물로서는 성공적으로 연출했지만 ‘소녀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이라는 점에서 아쉽게도 실패를 맛보았던 다이치 아키타로우 감독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다시 한번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를 원했고, 마침 대표적인 순정지인 「하나토유메(花とゆめ)」에 연재되며 인기를 끌고 있던 이 작품의 애니메이션 제작이 기획되면서 그가 감독으로 선임된 것이었다.
상황은 여러모로 유리했다. 주로 남성 시청자들을 위한 개그물을 주로 만들어 왔던 경력 때문에 소녀만화라는 장르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한번의 실패를 맛본 경험이 있는 다이치 아키타로우 감독은 그런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여성 애니메이터들을 중용했고, 그 사이에는 『아이들의 장난감』은 물론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의 제작에도 참가했던 여성 애니메이터 하야시 아케미(林明美)도 있었다. 물론 그녀가 담당한 부분은 작화감독과 캐릭터 디자인이었기에 작화파트를 제외한 연출파트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리라 보기는 힘들지만,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후르츠 바스켓』은 너무나 개그에 의존하다 실패한 『아이들의 장난감』과 너무나 정적인 화면에 의존하다 실패한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의 시행착오를 공유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게다가 그녀는 그 두 작품만이 아니라 『신세기 에반게리온』,『기동전함 나데시코(機動戦艦ナデシコ, 1996)』와 함께 TV 도쿄의 3대 괴작(怪作)으로 손꼽히는 『소녀혁명 우테나(少女革命ウテナ, 1997)』의 제작에 참여한 이색적인 경력이 있었다. 이 작품은 비록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하지 않았지만 유명한 소녀만화가 사이토 치호(さいとうちほ)가 원안을 담당했고 주인공 텐죠 우테나(天上ウテナ)의 외형이 『베르시이유의 장미』의 주인공 오스칼과 매우 유사했을 정도로 소녀만화적인 코드들이 산재해 있었다. 특히나 작품의 방향성 자체도 그러한 소녀만화의 코드들을 조합하고 재배치하면서도 살짝 비틀어 놓는 방식으로 애니메이션 내부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여성향의 장르를 개척하고 있었기에, 하야시 아케미 자신도 일련의 작품에 참여하는 경험 속에서 여성 애니메이터로서 정체성을 자각하고 여성 시청자들을 위한 새로운 그림체의 필요성을 크게 통감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 그녀가 『후르츠 바스켓』의 제작에 참여하게 된 것은 우연이든 필연이든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행운이었다.
결과적으로 『후르츠 바스켓』은 대성공이었다. 에피소드에 따라서 편차가 조금씩 있기는 했지만 기본적인 완성도도 높았고, 원작의 인기가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긴 했지만 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원작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굵은 외형선을 특징으로 가진 캐릭터 디자인도 훌륭했다. 이는 하야시 아케미가 전작 격인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에 참여했을 당시, 작품의 캐릭터 디자이너였던 히라마츠 타다시(平松禎史)의 화풍을 그녀 나름대로 소화한 결과였다. 내면의 반영 역시도 주목할 만했다. 물론 부족한 부분도 있었고 경우에 따라선 내면보단 개그에 크게 의존하는 장면이나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작품 전체를 기존의 애니메이션 문법이나 단순히 정적인 화면의 애매모호한 조합으로 때우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장난감』의 부족함과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의 지나침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소녀만화 원작’이 가져야 할 정적인 부분과 ‘애니메이션’이 지녀야 할 동적인 부분의 조화를 훌륭하게 소화했다. 소녀만화인 원작에 대한 충분한 자각과 함께 과거의 시행착오를 폐기처분하기보단 하나의 발판으로 삼은 결과였다.
당시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부른 일본 애니메이션의 성장과 그로 인한 애니메이션 전반에 걸친 변화의 바람은 소녀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물론 그것은 전체적인 비율로 봤을 때 아주 소수에 불과했고, 특히나 이 장에서 중점적으로 언급한 『그 남자와 그 여자의 사정』과 『후르츠 바스켓』의 경우로 축소한다면 그 전체적인 영향력은 더더욱 미미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설령 그것이 소수라고 할지언정 그러한 미미함 속에서 애니메이션이 이제야 소녀만화라는 ‘타자’를 의식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변화하고 있었으며, 그것을 미약하게나마 하나의 흐름으로 공유하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일찍이 소녀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은 그러한 요소들을 개별적으로 소유하고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이때만큼 깔끔한 삼위일체를 이룬 적이 없었다. 물론 그것이 다시금 갑작스럽게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 해도 이것이 분명 의미있는 일이라는 점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7. 오늘날의 소녀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 『후르츠 바스켓』이 방영된 2001년 이후, 21세기에 들어선 일본 애니메이션은 다시금 정체의 시기로 들어서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새롭고 실험적인 작품이 전혀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90년대 후반 애니메이션에 불어닥친 진화의 바람이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은 탓에 전체적인 작품들도 90년대의 성과물들을 공유하면서 내부에서 나름대로의 진화를 추구하는 채 더 이상의 무리한 확장을 시도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에 등장한 작품들 중 『X(2001)』, 『최유기 RELOAD GUNLOCK(最遊記 RELOAD GUNLOCK, 2004)』같은 작품은 이미 90년대에 한차례 애니메이션화 되었던 전작의 연장선에서 나름대로의 변주가 가해졌고, 『울트라 매니악(ウルトラマニアック, 2003)』, 『트윈 스피카(ふたつのスピカ, 2003)』, 『사랑해 베이비(愛してるぜベイベ★★, 2004)』 같은 작품들 역시도 90년대의 유산 -초반과 후반 모두- 을 공유하고 있었다. 극명한 퇴보나 단절은 없었지만 극적인 진화 역시도 없었고 미약한 성장만이 조금씩 축척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또 한번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노이타미나(Noitamina) 프로젝트20)의 일환으로 2005년 4월 슈에이사(集英社)의 월간 여성 만화잡지 「YOUNG YOU」를 통해 연재되고 있던 동명의 소녀 만화를 원작으로 『허니와 클로버(ハチミツとクロ-バ-, 2005)』란 작품이 방영되었다. 심야라는 취약 시간대임에도 불구하고 1화부터 3.8%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더니 이후에도 3%를 꾸준히 전후한 시청률을 기록했고, 상업적으로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며 종영 직후에는 2기의 제작까지 결정되었다. 이어서 방영된 노이타미나 프로젝트의 2탄 격인 『파라다이스 키스(パラダイスキス, 2005)』 역시 높은 인기를 끌며 그것이 단순히 순간적인 붐이 아님을 증명했고, 그 뒤를 이어서 『수왕성(獣王星, 2006)』이라는 작품이 현재까지 방영 중에 있다. 또한 이 시기를 전후하여 노이타미나 프로젝트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나나(NANA, 2006)』, 『오란고교 호스트부(蘭高校 ホスト部, 2006)』와 같이 90년대의 유산을 공유하면서도 자신들만의 새로운 해석과 스타일을 가미시킨 소녀만화 원작들의 애니메이션들이 속속 등장했고 또 등장을 예고하고 있다. 또다른 방향에서 또다른 방식으로, 다시금 소녀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의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시대가 막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시도들을 벌써부터 평가하려 드는 것은 분명 성급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이러한 움직임은 2000년대 후반이라는 오늘날의 특정한 시점에서 타의에 의해서 갑작스럽게 솟아오른 단절된 변화의 흐름이 아니라, 90년대 후반의 변화 멀게는 90년대 초의 정체나 80년대의 단절까지도 끌어안는 소녀만화 원작 애니메이션들의 오랜 성과물과 시행착오의 축적에 의한 자생적이고 연속적인 변화라는 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시도들을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분명 이러한 작품 한두 편이 성공한다고 해서 전체적인 애니메이션의 남성 편향적, 소년만화 중심의 구조가 쉽게 해체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아니 어쩌면 소녀만화는 애니메이션에 있어서 영원한 타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노력이 설령 일본 애니메이션 전체를 바꿀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단절되지 않고 하나의 흐름을 가진 채 계속 이어져 나간다면 철저한 시스템화로 인해 쉽게 정체되어 버리는 일본 애니메이션에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공급하는 하나의 안티테제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아마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한, 시행착오여도 좋은 시도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8. 맺음말 일본 애니메이션은 1963년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의 방영 이후 만화와 특수한 공조체제를 형성하고 그 구조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 왔다. 하지만 그러한 구조가 너무나 오랫동안 아무런 의심없이 통용되어 오면서, 이제는 본질적으로 다른 만화와 애니메이션이라는 두 장르의 구별이 모호해진 것은 물론 장르에 대한 시선 역시도 그저 ‘만화를 원작으로 애니메이션을 만든다.’라는 단편적인 구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물론 이것은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일 수도 있고, 또 어떠한 의미에서는 두 장르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만화 영화’라는 단순한 개념으로 뭉뚱그려 파악하게 만드는 시선이 오랫동안 통용되면서 각각의 장르 내부에서 발생하는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층위의 분화들을 무시하게 만들어 버렸고, 세부적으로는 애니메이션 자체가 소녀만화와 소년만화라는 성별에 의한 만화 장르의 분화중 남성의 그것에 훨씬 중점을 두고 특화된 교류만을 해왔다는 사실, 다시 말하면 일본 애니메이션의 고질적인 남성 편향적인 구도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을 가질 기회를 박탈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논문은, 소년만화 중심의 애니메이션-만화의 공조체제가 형성되었던 시기와 소녀만화가 만화 내부에서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 자리잡아가는 시기를 출발점으로 과연 일본 애니메이션은 그러한 소녀만화를 어떤 식으로 수용해 왔고 또 배재해 왔는가, 그리고 또 소녀만화는 어떻게 변해왔고 그 변화는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존재해 왔는가를 살핌으로서, 애니메이션 내부에서 타자로 자리잡아왔던 소녀만화에 대한 망각되어 있던 시선들을 복구하고 궁극적으로 그러한 과정에 어떠한 문제가 있었는지 혹은 그러한 망각이 어떤 소녀만화의 의미를 놓치게 만들었는지를 탐구해보고자 하는 의도로 쓰여졌다.
물론, 그렇다고 이러한 시각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지금껏 만화라는 장르로 뭉뚱그려져 왔던 내부 속에도 소년만화와 소녀만화의 분화가 있었듯이 소녀만화 내부에도 분명 나름대로의 분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나 스스로가 이 글이 가지는 관점을 견지하기 위해 의도적이든 아니든 분명 놓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임의적인 시대적인 구분 역시도 애니메이션 장르 전체의 흐름을 따른 것이니만큼, 소녀만화라는 특정한 장르에 한정한다면 보는 시각과 자료의 깊이에 따라서 더욱 깊어질 수도 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시대 구분보다는 개별적인 작품이나 작가, 감독에 초점을 맞추어 애초에 이 글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소녀만화 원작의 애니메이션에 접근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나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아마도 특정한 과거의 시점에서 인위적으로 형성된 가치가 오랜 기간 동안 아무런 의심없이 통용되면서 어느 순간부터인가 강한 상징성만이 남아 자연스러움을 빙자한 획일적인 의미를 강요하는 것을 경계하고, 그로 인해 오랫동안 ‘부재’해온 담론을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복구시키고자 하는, 절대적이지 않은 사소한 문제제기가 갖는 소박한 가치일 것이다.
참고문헌 Cinephile 外 다수,『소녀혁명 우테나 연구문집』,2004
박정배, 강재혁 『아니메를 읽는 7가지 방법』 미컴 ,1999
한국 만화 애니메이션 학회, 『일본 애니메이션의 분석과 비판』 한울 아카데미, 1999
송락현, 『일본 극장 아니메 50년사』스튜디오 본프리, 2003
안토니아 레비, 이혜정 옮김 『외계에서 온 사무라이』초록배 매직스, 2000
오오쯔카 에이지・사사키바라 고, 최윤희 옮김『망가・아니메』, 열음사, 2004
정하미, 『눈동자의 빛으로 일본만화를 본다』, 지식산업사, 2005
요시히로 코스케, 송보선 옮김 『일본만화 현대사』 우용출판사, 1998
닛케이 BP사 기술연구부, 성하목 옮김 『일본 애니메이션과 비즈니스 전략』한울 아카데미. 2001
수잔 J. 네피어, 임경희 옮김 『아니메』, 루비박스, 2005
박태진, 『저패니메이션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 : 아톰에서 슬램덩크까지』, 길벗, 1997
이명석, 『이명석의 유쾌한 일본만화 편력기』, 홍디자인, 1999
二上洋一, 『少女まんがの系譜』 ぺんぎん書房, 2005
山口康男, 『日本アニメ全史』 株式會社 デン․ブックス, 2004
竹內オサム・小山冒宏, 『アニメへの変容』現代書館, 2005 주석1)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 1928~1989), 1928년 일본 효고현 다카라즈카시 출생, 패전 직후 1946년 만화가로 데뷔하여 당시까지만 해도 글과 그림의 단순 조합에 불과했던 만화에 영화의 카메라워크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컷의 개념을 도입하고 다양한 표정의 변화와 기호를 통해 캐릭터의 감정을 묘사하는 연출기법을 확립시키면서 거의 혼자 힘으로 일본의 만화를 한 단계 끌어올린 전설적인 인물이다. 게다가 1954년 발표된 일본 연간소득순위에서 화가부분 1위에 오를 정도로 만화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리면서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60년대 초반 애니메이션 업계에 뛰어들어 1963년 자신의 만화 『철완 아톰』를 원작으로 당시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TV 애니메이션을 최초로 제작하면서 일본 애니메이션의 신기원을 열었고, 이후에도 『정글 대제(ジャングル大帝, 1965)』,『리본의 기사(リボンの騎士, 1967)』등의 작품을 제작하면서 오늘날 애니메이션 강국 일본을 지탱하는 시스템적 기반을 손수 닦았다. 1989년 위암으로 타계한 이후 지금도 그의 업적의 공과 과를 두고 갑을 논박이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일본만화의 신, 아니메의 아버지로 추양 받을 정도로 만화와 애니메이션 양 장르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서 오늘날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만화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2) 일본식 표기로는 ‘소죠망가(少女まんが)’, 구체적인 개념이나 사전적인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 10대 초,중반 멀게는 20대 초반 까지의 여성들을 대상으로 작화, 소재, 연출 스타일 등의 요소들이 특화된 만화를 포괄적으로 일컫는 단어로 한국에서는 거의 비슷한 뜻으로 ‘순정만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이 논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소녀만화’의 정확한 정의는 본론에서 논의하기로 하고 일단은 편의상 그러한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소녀만화라는 명칭을 사용하도록 하겠다.
3) 『모모타로의 바다 독수리(桃太郎 海鷲, 1943)』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桃太郎 海の神兵, 1945)』, 태평양 전쟁 당시 군부의 주도하에 일본인의 항전 의식을 드높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극장용 애니메이션과 그 후속작, 전자의 경우에는 작화 매수가 10만장에 달하고 필름길이가 1,108m에 이르는 대작이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전쟁 와중에 필름이 소실되어 현재로선 기록 외에는 그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다. 후자인 『모모타로 바다의 신병』의 경우는 다행히도 1984년 기적적으로 필름이 발견되어 단편적이나마 이미 그 당시부터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선 일본 애니메이션의 뛰어난 기술력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청년 시절의 데즈카 오사무가 이 작품을 보고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며 비록 기준의 모호함 때문에 토에이 동화의 『백사전(白蛇伝, 1958)』과 함께 일본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자리를 두고 갑을논박이 있기는 하지만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정도로 방대한 물량을 투입하여 장편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는 그 상징성만으로도 일본 애니메이션 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역작이다.
4) 1956년 영화사였던 ‘토에이(東映)’가 야마모토 사나에(山本早苗)가 경영하는 ‘니치도 영화(日動映画)’의 주식을 인수해 설립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로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이기도 하다. 이전까지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주로 개인 프로덕션의 형태로 비록 규모의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작가와 어시던트에 의한 가내수공업의 형태로 이루어지면서 제작효율성이 떨어지고 재정기반도 취약했던 반면 토에이 동화는 동양의 디즈니를 표방하며 초대 사장이었던 오오카와 히로시(大川博)의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미국의 선진 스튜디오 시스템을 모방하여 일본 최초로 현대적인 스튜디오 시스템을 확립시킨 제작사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로선 유일무이한 상업적인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스튜디오로서 『백사전(白蛇伝, 1958)』, 『소년 사루토비스케(少年猿飛助, 1959)』와 같은 뛰어난 작품을 제작했던 것은 물론, 모리 야스지(森康二), 오오츠카 야스오(大塚康生), 다이쿠하라 아키라(大工原章)등의 1세대 애니메이터들에겐 안정된 작업기반을 제공해 주었고 나아가서 린타로(りんたろう), 다카하타 이사오(高畑勲),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와 같은 차세대 애니메이터들을 다수 배출함으로서 당시는 물론 오늘날까지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인재풀의 역할도 톡톡히 했던 곳으로 데즈카 오사무, 무시 프로덕션과 함께 오늘날 일본 애니메이션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또 다른 중심축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그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아니메를 검토는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작비와 제작 기간을 고려하면 도저히 현실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당시 도에이 동화에서 1시간 30분 정도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경우, 스텝수가 200~300명, 제작기간이 1년 반, 제작비는 6000만 엔 정도가 들었다. 이것은 정통 디즈니 스튜디오 제작 방식으로 미국과 유럽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다. 이 방식으로 30분짜리 프로그램을 만든다면, 단순 계산으로도 한 편당 스텝수가 100명 제작기간이 6개월로, 적게 잡아도 예산이 3000만엔이 된다. 30분짜리 TV프로그램 한 편의 제작비가 50~60만엔에 불과한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 <야마구치 야스오(山口康男), 일본 아니메 전사(日本アニメ全史), TEN BOOKS, 2004, 75P 인용>
6) 1962년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를 중심으로 곤노 슈지(紺野修司), 스기이 기사부로(杉井儀三郎), 사카모토 유사쿠(坂本雄作)와 같은 토에이 동화 출신의 애니메이터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1963년 일본 최초의 TV 애니메이션 『철완 아톰(鉄腕アトム, 1963)』을 제작한 이후 계속해서 『정글 대제(ジャングル大帝, 1965)』 『리본의 기사(リボンの騎士, 1967)』등의 작품들을 제작하며 60년대 일본 애니메이션의 발전을 이끌었다. 71년 데즈카 오사무가 무시 프로덕션을 나가서 ‘데즈카 프로덕션(手塚プロダクション)’을 창설한 이후 1973년 재정난으로 도산하고 말지만 1977년 다시 발족, 오늘날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7) 대표적인 안티 디즈니 프로덕션인 UPA(United Production of America)의 설립자인 스티븐 보서스토우(Stephen Bosustow)가 개발한 애니메이션 제작 기법, 디즈니에 의해 개발된 전통적인 풀 애니메이션 기법이 기본적으로 1초에 서로 다른 그림이 그려진 24장의 필름이 순차적으로 돌아가는 구조인 반면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은 2, 3장에 걸쳐 같은 그림을 사용하는 기법으로 비록 움직임이 풀 애니메이션에 비해 훨씬 조약해 지긴 해도 제작비와 시간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었기에 짧은 시간에 많은 작품을 제작해야 했던 당시 일본 TV 애니메이션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대안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초창기부터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리미티드 기법은 결국 일본 애니메이션 속에서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았고 그 조약함을 극복하기 위한 발전과 진화를 거듭하며 꾸준히 이어져 나가면서 오늘날에는 일본 애니메이션만의 차별화된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8) 마치 은행에 돈을 저축해두고 필요할 때 찾는 것처럼, 특정한 장면을 미리 촬영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다시금 재활용해서 쓰는 기법으로 애니메이션 제작에 필요한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게 해주었다.
9) 당시의 데즈카의 이 계약을 두고 많은 애니메이터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싶었던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무리한 계약을 받아들임으로서 오늘날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영세성, 나아가서 그런 영세성으로 인한 애니메이터들의 저임금과 중노동을 고착화시킨 원인으로 지목하며 비판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는 데즈카의 발언 등으로 미루어볼 때 일정부분 사실이기는 하지만 TV 프로그램의 제작비가 보통 편당 50~60만엔에 불과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아직까지 상업성조차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던 TV 애니메이션으로선 그 이상의 계약을 이끌어 내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중론이며 설령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그로 인하여 일본 TV 애니메이션의 시작은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10)이런 저런 노력 끝에 구체적인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던 『철완 아톰』은 그 시작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이는 당시 최고의 인기 만화가였던 데즈카가 만화와 애니메이션 제작이라는 두가지 일을 병행하면서 데즈카의 원화가 계속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보다 못한 스텝들은 몇몇 중진 스텝들을 중심으로 5명이 돌아가면서 각화를 징검다리 식으로 맡아 제작하는 시스템을 취하기로 했고 그러한 특단의 조취를 취한 결과 무시 프로덕션은 작업능률을 높여 주 1회 방영이라는 TV의 살인적인 스케쥴을 맞출 수 있었다.
11) 쇼화 24년(1949년)을 전후하여 태어나 70년대 소녀만화가로 데뷔한 여성 작가군(群)을 지칭하는 단어, 70년대 소녀만화의 진화를 이끌었다는 상징적인 위치와 출생년도정도를 제외한다면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그 구성 멤버가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주로 이케다 리요코(池田理代子), 다케미야 케이코(竹宮恵子), 하기오 모토(萩尾望都) 등의 작가가 핵심 멤버로 손꼽힌다.
12) 이것은 분명 70년대를 전후한 소녀만화 영역에서 확립된 방법이었다. 그 증거로, 24년조 중 한 사람인 하기오 모토의 작품을 보더라도 1969년의 『케네스 아저씨와 쌍둥이(ケネスおじいさんとふたご)』에서는 말칸 밖의 대사가 하나밖에 발견되지 않는 반면 1971년에 발표한 『11월의 김나지움(11月のギムナジウム)』에서는 육성대사가 아닌 문자들이 배경에 난무하는데 그것들이 모두 의미를 구분하여 배치되고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다.
<오오츠카 에이지(大塚英志), 사카키바라 고(サカキバラゴウ),『망가․,아니메』, 써드아이, 2005, 72p 참조>
13) 정하미,『눈동자의 빛으로 일본만화를 본다.』, 지식산업사, 2004, 158-159p 참조
14) 모든 배역을 여성이 연기하는 독특한 형태의 일본의 근대 연극, 일본에 서양문물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사람들이 전통적인 일본 연극을 외면하고 서양의 춤추고 노래하는 쇼들을 즐겨보는 것을 본 1914년 고바야시 이치요(小林一三)란 인물이, 여자 역도 남자가 하는 일본의 전통연극 가부키보다는 등장배우가 모두 여자인 극단이 서양과 동양적 요소를 혼합한 뮤지컬을 공연하는 것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 이후 극단을 세우고 극장을 지어 작품을 공연했다고 한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의 소녀만화들은 애니메이션보다는 타카라즈카로 훨씬 많이 컨버젼되었고 그 과정에서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다.
15) Original Video Animation의 약자, 기본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 TV나 극장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VHS나 LD등의 매체로서 발매하는 것을 말한다. 80년대 초반, 애니메이션 제작 인력의 공급 과잉과 좀 더 새로운 작품을 요구하는 팬들의 욕구 사이에서 탄생한 새로운 스타일의 애니메이션 배포 방식으로 이후 90년대 후반까지 성행하며 일본 애니메이션 발전의 한 축을 담당했다. 83년 토리우미 히사유키(鳥海永行), 오시이 마모루(押井守)가 공동감독을 맡고 아마노 요시타카(天野喜孝)가 캐릭터 원안 및 디자인을 맡아 제작한 『달로스(ダロス)』라는 작품을 그 시초로 꼽고 있다.
16) 사실 이후 전개될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한다면 앞서 ‘로맨스물의 전성기’라는 단락에서 96년에 방영된 작품들을 포함시켜 이야기를 전개시킨 것은 조금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첫 방영된 시기가 95년 10월이고 그에 대한 팬들의 적극적인 반응이 나오기 시작한 것은 작품이 종영될 때쯤인 96년 초 즈음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미 이전부터 기획에 들어가 있었을 96년 중반까지의 애니메이션들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영향력에서 미치지 않은 작품으로 생각하는 편이 좋을 듯하여 그러한 작품들을 그 이전의 작품들과 같은 범주로 분류했다.
17)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방영 이전까지 TV 도쿄의 심야시간대에 편성된 애니메이션은 고작 주 4편, 그것도 인기리에 종영된 작품을 재방영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것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으로 인한 TV 애니메이션 붐에 힘입어 당시 애니메이션 업계에 뛰어들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미츠비시 상사(三菱商事)가 비교적 전파료가 저렴한 심야시간대의 애니메이션 방영을 계획했고 그 결과 1996년 10월 TV 도쿄를 통하여 최초의 심야 애니메이션 『헌티드 정션(Hunted Junction)』이 방영되었고 이후 꾸준히 심야 애니메이션의 편성이 증가하여 최근에는 주 15편의 심야애니메이션이 TV 도쿄의 전파를 타고 있다.
18) 일반적으로 별도의 시청료를 지불해야 시청이 가능한 프로그램을 지칭하는 스크램블의 반대말로서 특정 위성방송에 가입되어 있는 세대라면 별도의 시청료 없이 시청이 가능한 방영방식을 말한다. 90년대 중반 이미 제작된 애니메이션의 판권을 사서 스크램블로 방영하던 일본의 위성방송 WOWOW는 자체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길 희망했지만 스크램블 방송으로는 CM을 내보내지 못했기에 TV 광고 스폰서를 따기가 불가능했고 노출 빈도역시 적어 LD나 케릭터 상품 등의 2차 수익을 얻기가 힘들었기에 생각만 있었을 뿐 실제 제작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97년 ‘선라이즈’에서 자사의 최신작 『브레인 파워드(ブレンパワ-ド)』의 방영을 WOWOW에 의뢰함으로서 최초로 위성방송을 통한 논 스크램블 애니메이션 방영이 실현되었고 이후 ‘애니메이션 콤플렉스’ 같은 프로그램이 신설되는 등 꾸준히 편성 편수를 늘려가 2000년에는 7편에 달하는 애니메이션이 논 스크램블로 방영되었다.
19) 기본적으로 늦은 밤 방영을 하는 심야 시간대의 애니메이션의 당시 시청률은 평균 1%, 잘 해봐야 2%를 넘기도 어렵고 심지어 0.5%같은 수치도 심심치 않게 기록된다. 황금시간대인 6시경에 방영되는 TV 애니메이션들이 보통 5%를 기점으로 인기 애니메이션인가 아닌가를 가늠하고 『도라에몽』이나 『사자에상』 『포켓 몬스터』같은 국민 애니메이션이 20%가 넘는 시청률을 꾸준히 기록하는 것으로 볼 때 이 수치는 심야 애니메이션의 상업적인 가치마저 의문시될 정도로 낮은 수치다. 하지만 심야 애니메이션의 퀄리티는 오히려 일반 TV 애니메이션을 훨씬 상회하고 있는데 이는 그만큼 높은 제작비가 투입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런 모순적인 현상이 가능한 것은 바로 심야 애니메이션의 독특한 수익 모델에 있는데, 대다수 심야 애니메이션들은 낮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TV 방영을 그저 광고 정도로 생각하고 실제 수익은 작품을 다시 LD나 VHS등으로 발매하여 회수하는 시스템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수익모델은 TV 애니메이션 이라기보다는 OVA에 가까운 것으로서 실재로 현재 일본에서 심야시간대에 애니메이션을 제작해서 공급하는 회사는 대부분 OVA 회사가 주루를 이루며 그 때문에 심야 애니메이션이 성행한 90년대 후반부터 일본 OVA계는 전체적으로 침체기를 맞고 있다.
20) 일본 애니메이션은 전통적으로 아동과 10대 남성 시청자를 주 대상으로 작품을 제작해 왔다. 노이타미나 프로젝트란 바로 그런 기존의 일본 애니메이션의 경직된 제작 구조를 벗어나 기획 차원에서부터 여성층에게도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을 제작하여 그동안 애니메이션이란 장르 내외부적으로 소외당해 왔던 젊은 여성 시청자들을 애니메이션 팬층으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후지 TV의 기획으로, 2005년 5월부터 목요일 24시 30분의 시간대를 노이타미나 타임으로 지정하여 이러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제작된 작품을 방영하고 있다. Animation을 거꾸로 읽은 신조어인 노이타미나(Noitamina)라는 단어는 그런 전복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