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션 <오란고교 호스트부>에 대하여
* 만화책은 못 봤고 애니만 봤습니다.


오란고교 호스트부에 실수건 뭐건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란고교 호스트부>.
제목에서 왠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포스를 느끼게 되는 이 작품은 백천사의 소녀잡지에서 연재된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이다. ‘호스트’라고 하는 제목에서 어쩐지 BL삘을 느껴버리고 뒷걸음치지만(혹은 달려들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의외로 주인공은 여자인데다가 노말물이다(잘 생각해보면 명백하게 편견 섞인 판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호스트랑 호모랑은 아무 상관이 없지 않은가 -_-;). 그렇다면 키리미양(11화 출연)의 말대로 역할렘물? 으~음... 그렇게 볼 수도 있을려나...

흔히 예쁜 정지화상과 오르골 음악과 유명성우로 승부하려는 경향이 강했던 여성향 애니임에도 불구하고, ‘애니메이션의 진정한 재미는 움직인다는 데에 있다!!’라고 외치는 듯한 괴물같은 동화 퀄리티와 연출이 보는 이의 눈을 사로잡는다. 캐릭터들은 대사를 하는 동안에도 쉴새없이 움직이고 그러는 동안 배경에 있는 제삼자들도 각기 움직이고 있다. 배경은 계속 바뀌고 동작은 중첩된다(오프닝을 보라. 연속으로 이어지는 화면 중첩연출이 끝장이다). 그러면서도 동화는 전혀 망가지지 않고, 작화 또한 어느 장면을 캡쳐해도 그림이 될 만큼 깔끔한 선과 화려한 색감을 유지하면서, 아름다운 장면을 추구하는 소녀만화의 미학(그러나 애니에서는 결코 구현되기 쉽지 않은 미학)을 방영 4개월이 지나도록 꿋꿋히 지켜나가고 있다.
제작사는 <울프스 레인>이나 <강철의 연금술사> 등으로 유명한 본즈. <강철연>의 경우 원작을 무시하는 각색 때문에 팬들에게 무던히도 혹평을 들었지만 작화나 동화 등의 퀄리티만은 화끈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번 신작 <오란고교>에서도 그 실력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감독은 이가라시 타쿠야. 세일러문ST, 도레미, 내일의 나쟈 등을 감독한 소녀애니 전문(?) 이다. 각본 및 시리즈 구성에는 소녀혁명 우테나와 세일러문 S, 망각의 선율로 유명한 에노키도 요우지, 캐릭터 디자인 및 작화감독은 카드캡터 사쿠라와 동경바빌론 등을 맡았던 타카하시 쿠미코가 버티고 있다. 내멋대로 정의하자면 환상의 라인업이다.


어둡고 우울하고 질척한 것은 다 빼고 상큼함으로 승부하라!

가진 건 돈밖에 없는 재벌집 자제들이 다니는 초호화 교육시설인 오란학교. 이곳에 특별장학생으로 들어온 평범 서민 하루히는, ‘너무 심심해서 시간 때우려고’ 오란고교 여학생을 접대하는 호스트부에 모인 여섯 꽃미남들과 마주치게 된다. 실수로 호스트부의 꽃병을 깨고 그 변상을 위해 호스트부의 시종이 되었다가 미모를 인정받아 호스트부원으로 승격되지만, 알고 보니 너무 외모에 무심해서 그렇지 하루히는 남자가 아닌 여자였다.

이 작품의 최대 장점은 개그물이라는 점이다. 개그물 특유의 빠른 대사와 오버액션에도 충실하지만, 조금 더 마니악한 팬들을 즐겁게 해주는 요소는 바로 갖가지 패러디이다. 기존 소녀만화들이 쌓아온 여성향 코드들을 모아서 개그 패러디를 하는데, 충격받으면 <유리가면> 풍의 백안이 되고 야오이 형제 컨셉으로 손님을 모으고 꽃미남들을 카테고리화하여 분류하는 등등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이런 마니악한 부분까지 몰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지만, 아는 사람들이 더 뒤집어지는 것은 물론이다.

그뿐이 아니다. 남장 호스트 하루히의 주위를 둘러싼 꽃미남들에게는 ‘언제나 그렇듯이’ 각자 모종의 트라우마가 있다. 그늘이 있는 남자가 여주인공에게 호감을 갖고 그로 인해 여주인공이 남자를 갱생시킨다는 스토리는 소녀만화의 영원한 테마 중 하나이자 희망사항이지만, <오란고교>는 그 환상을 건드리면서도 살짝 비껴간다. 끈적끈적하지도, 질척질척하지도 않고 쿨하면서도 상큼하다는 점이 이 판타지 학교물의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왜 호스트를 하는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러한 특징은 ‘호스트’라는 부활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호스트란 접대부이다. 손님과 함께 하면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해주지만, 그러한 ‘접대’가 그들의 일이고 더 이상 깊게 파고들지 않는 것이 호스트이다. 오란고교 호스트부의 부원들은 자기 세계가 무척이나 강하고, 때로는 그것이 과거의 상처와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그 때문에 외부의 누군가를 갈구하지는 않는다. 자기 세계가 강한 만큼 그에 익숙해져 있고 자존심도 강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조금 더 밀어붙이면 일종의 오타쿠에 가깝다). 하지만 아무리 자기 혼자 잘 노는 성격이라도 인간은 인간, 그런 아이들이 외부와 소통하는 방식으로 찾아낸 것이 ‘호스트(접대부)’다. 실로 깔끔하고 이상적인 관계가 아닌가.
그래서 사실 부원들은 호스트가 좋아서 이 부에 있는 것은 아니며, 진정한 관심사나 자기세계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다. 쿄우야가 17화에서 했던 말이 정확한데, 각자에게 이득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호스트부 활동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이득’이라는 것은 금전적인 형태와는 일절 관계가 없다. 돈이라면 썩어나도록 있는 아이들이니까. 그 비밀은 호스트부의 발기인이며 회장이고 진짜로 호스트를 좋아하는 유일한 사람(다들 안약을 쓰지만 얘는 진짜 눈물을 흘린다), 모두가 인정하는 공인바보 스오우 타마키(통칭 타마킹)에게 있다.


나르시스트 딸바보 왕자 - 타마킹

원래는 여주인공이 맡아야 할 포지션임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이 의외로 치유계 캐릭터이다. 타마키에게는 우열/열등 의식이 없다. 맨날 서민 서민 하면서 돈많은 재벌2세 티를 팍팍 내는데도 밉지 않은 이유는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타마키에게 있어 자신의 가문이나 세계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며, 자랑할 이유도 비하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세계에 대해서 무한한 호기심을 가지고 대한다. 소위 ‘서민의 놀이’나 ‘서민의 커피’라는 것에 대해서도 아무런 편견이 없고, 자신의 맘에 들면 거리낌없이 받아들인다. 타인의 세계를 존중하고 그 영역을 침범하거나 바꾸려 하지 않는(=갱생시키려 하지 않는) 점이 타마키의 최대 강점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독불장군들만 잔뜩 모인 호스트부를 끌고 나갈 수는 없다.
그런 주제에 자기가 꼭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서는 사정 안보고 밀어붙이지만, 부원들은 그런 부장의 고집에 귀찮다고 찌푸리면서도 결국 하자는대로 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 듯하다. 타마키와 쿄우야의 부 운영방식이 14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타마키의 사랑스러움(이라고 해야겠지...)이 무척 돋보인다.

18화까지 애니가 진행된 지금, 각 부원들의 과거와 ‘자기 세계’의 윤곽도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바깥 세계를 무시하고 자기들끼리만 놀던 히타지인 쌍둥이, 집안의 기대 때문에 자신의 취향을 포기해야 했던 하니 선배, 삼남으로서 무조건적인 유능함을 요구받았던 쿄우야 등등. 이 아이들은 너무도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탓에 역으로 극히 좁은 세계밖에 알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돈이 넘쳐나니 굳이 타인의 비위를 맞추거나 교류할 필요도 없고, 반면 거대한 집안과 한정적인 인맥에 눌려 고독한 자기세계에 갇혀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일종의 숨구멍을 터준 것이 타마키의 ‘호스트부 활동제안’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호스트부 활동을 시작하면서 생겨나는 새로운 갈등들도 존재한다. 이제 쌍둥이는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와야 하고, 하니 선배는 너무도 오타쿠틱하게 자기 취향을 추구한 나머지 가족과 트러블이 있고 쿄우야는 이득을 최우선하도록 길러진 사고방식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은 - 살짝 어두운 과거까지도 - 전부 개그로서 표현된다.
이 애니의 좋은 점은, 전형적인 소녀만화적인 배경을 캐릭터들에게 부여하면서도 결코 어둡게 진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잖아도 과잉 자학하는 어두운 엄마친구 아들들에게 질려가던 판이라 이런 상큼한 판타지가 맘에 든다. (4화에서, 만일 공식대로 칙칙했더라면... 이라는 렌게의 시나리오가 나오는데 이게 또 걸작이다)


자기 앞가림은 확실히 - 하루히

그리고 하루히가 있다.
하루히는 (종종 애니 자막에도 뜨지만)이런 할렘물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로 쿨한 히로인이다. 전통적으로 이런 포지션의 히로인은 오지랖이 넓고 주변의 남자들을 갱생시키려 힘쓰지만(그래서 독자들에게 반발을 사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루히에게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 것이 신조인 하루히는, 똑같은 논리를 타인에게도 적용시킨다. 저쪽에서 도움을 요청해온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타인의 세계를 확실하게 존중하는 것이다. 오지랖이 넓은 것은 타마키 쪽이며 하루히는 거기에 태클을 거는 역할이다. 가끔은 일본의 전통적인 보케-츳코미 콤비같다는 생각도 든다.
하루히는 재벌집 자식인 다른 호스트부원들과 달리 소위 ‘서민’으로서의 현실 의식을 가지고 들어온다. 게다가 아무리 주변 부원들이 자신을 휘둘러대도 현실에서 발을 떼지 않는다. 판타지 그 자체인 호스트부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현실, 혹은 현실과의 통로 역할을 하고 있는데(이상한 나라의 하루히 에피소드가 상징적이다) 엄청나게 이질적인 존재임으로 인해 다른 부원들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들이 보아왔던 좁은 세계의 바깥에 더 넓은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하루히의 존재로 인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역시 히타지인 쌍둥이 형제라고 생각된다. 성우 팬들은 목소리로 둘을 구분한다지만 솔직히 나는 초반에 얘네들 성우가 같은 사람인 줄 알았다 -_-; (참고로 평소에 야오이짓을 할 때 공이 형 히카루고 수가 동생 카오루임) 이름만 간신히 외웠을 뿐 누가 누구인지도 구별할 수가 없었던 쌍둥이가 처음으로 대립하게 되는 것이 5화. 발단은 하루히 때문이었고, 싸움이 위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성격이 다르다는 점이 5화에서 어필되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마치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유아 상태에 머물러 있는 듯한 두 사람의 세계에 처음으로 끼어들어와서 정확히 둘을 분리해낸 하루히의 존재는 쌍둥이에게 있어서 특별했을 것이다. 마치 태어나서 처음으로 '쌍둥이'가 아닌 '히카루'와 '카오루'라는 별개의 객체로 존재하게 된 것 같은 느낌이 아닐까.
쌍둥이의 본질을 보는 하루히는 히카루가 좀 더 싸가지가 없다고 말했는데 그게 정곡이다. 5화에서 카오루는 히카루의 눈치를 살피지만 히카루는 하루히의 뒷모습만을 보고 있다(시선만으로 캐릭터를 표현하는 연출은 정말 굉장했다!♡). 눈치빠른 카오루는 그래도 형에 비해서 타인을 배려할 줄도, 바깥 세계를 볼 줄도 알지만 자신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존재인 히카루가 성장할 때까지 같이 기다려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잡설이지만, 그런 의미에서도 렌게는 굉장하다 -_-; 4화에서 나왔던 렌게의 각본을 본 쌍둥이들이 왜 평소의 공-수역을 바꿔 배치했냐고 투덜거리는 장면이 있는데, 이 아이들의 실제 성격은 평소 연기하던 포지션과는 반대였던 것이다. 인간의 본성까지 꿰뚫어보는 동인녀 근성이랄까... 라미카 이래 이렇게 무서운 아가씨는 처음 본다)

이렇듯 독립심이 유달리 강한 히로인의 존재는 온통 고집쟁이(에 히키코모리에 오타쿠)뿐인 호스트 부원들에게 독특한 영향을 미친다. 뿐만 아니라 시청하는 여성들로 하여금 하루히에게 거부감을 가지기보다 귀엽다고 느끼게 하는 효과도 있다(남장을 하고 다닌다가 가끔 평상복이 나온다는 점도 포인트). 살인적인 작화가 그런 느낌을 한껏 살려주고 있다.


<오란고교 호스트부>는 심각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제까지 '심각한 이야기'라고 전해내려오던 소재들을 죄다 웃음거리로 삼는데 열심이다. 그야말로 호스트(접대부)처럼 시청자들에게 뒤끝이 없는 즐거운 웃음을 선사하는 기쁨조(...) 역할이 이 작품의 존재의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s : 하지만 이 애니에서 9화는 완전 실패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BL이나 꽃미남 등 '여성이 이성에게 가지는 환상'에 대해서는 그토록 잘 이해하고 녹여냈던 주제에, '여성이 동성에게 가지는 동경'이라는 테마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억지로 꼬아대는 바람에 완전히 '비웃음'이 되고 말았다. 보는 동안 하나도 즐겁지 않고 불쾌하기만 했으니. 장미는 되고 백합은 안된다는 거냐? 다음화에 이 즈카부가 재등장한다고 하니, 제발 이번 기회에 지난 실수를 만회했으면 좋겠다.
주위에선 기대하지 말라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by 살아가자 | 2006/08/04 17:44 | 애니메이션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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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알테마 at 2006/08/04 18:11
우와. 역시 분석 굉장하세요ㅜㅜb 완성 기다리겠습니다! 정말 저 작품의 최대 의외점은 '치유계는 타마키'인 것 같습니다(웃음). 이미 하루히가 들어온 시점에서, 그들의 트라우마는 타마키로 인해 어느정도 치유된 상태였죠. 하루히가 어디까지나 아이돌이지 성모님이 아니라는 게 좋습니다(그럴 성격도 아니지만). 저도 어느새 타마키가 너무 이뻐서-_-; 타마키가 부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에피소드가 나올 때마다 흐뭇하야 행복에 겨워하는 지경이 됐습니다(이미 히로인 취급). 정말 재밌는게, 타마키 과거지사는 하루히 말대로 참 아침 드라마틱한, 그리고 여타 순정만화였다면 우울해하며 땅파고 그늘지고 싸가지만땅의 '실은 가여운 아이'가 되었을 법한 것인데도 타마키는 마냥 밝죠.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에요. 그런 점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즐거우니까요. 호스트들을 만나 잠깐의 일상을 벗어난 즐거움을 느끼듯, 그런 패러디들을 보면서 마구 웃을 수 있다는게 즐거워요.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6/08/04 23:02
타마키의 과거는 주워듣기만 했습니다만, 렌게의 표현에 따르면 "고독한 왕자"였죠(대폭소). 실은 그냥 딸바보지만.
사실 쓰다가 밥먹고 나니 글을 쓸 기운이 다 빠져서 마무리만 했습니다. 이래서 한번 잡았을 때 끝장을 봐야 하는데 ㅠ_ㅠ
저도 타마키가 너무 귀여워서 어쩔 줄 모른답니다 ^^; 14화에서 강아지 흉내내는 장면만 계속 돌려보는데, 미야노씨의 귀여움에 녹아버릴 것 같아요...
Commented by 쇼코라 at 2006/08/08 22:42
좋은 포스팅 감사합니다. 재밌게 읽었어요.
정말 이 만화의 매력은 치유계가 타마키인것과 히로인이 쿨~하다 못해 아저씨같은 점이더군요.
호스트부 애들도 하나같이 보통 소녀만화라면 땅을 퍽퍽 파고있을 어두운 과거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걸 앗사리 개그소재로 삼고 넘어간다는 점이 정말 신선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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