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페이즈(1997)」- 이보다 더한 순애보는 없다
야마다 레이지의 「아가페이즈(1997)」를 본 것이 어제 새벽. 그 후로 귀에 들리는 노래는 잔다르크건 네미시스건 사쟌 올스타즈건, 심지어 이수영마저 유리의 노래로 들리는 지대한 후유증을 겪고 있습니다. 듣는 노래마다 뮤직비디오 콘티가 떠오르는데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뭘 만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림을 그릴 줄도 글을 쓸 줄도 모르고 해서 괴로운 상태. 결국 이렇게 낚시글로나마 버닝심을 표출합니다. 이미 원판 코믹스를 주문했고, 한국판도 중고시장을 뒤진 끝에 대여용으로 두 질이나 질렀으니 관심있으신 분은 연락 바랍니다.


비주얼 락 인디계에서 촉망받는 카리스마 가수인 미즈키 유리(16세)는 사실 엄청 소심한데다 게이다. 8년 간 짝사랑해온 야구 소년 토라키에게 접근하다가, ‘고시엔 진출’이라는 그의 꿈을 이뤄주고 싶어서 야구를 시작한다. 하지만 허약체질이라 도움이 안 되는 유리의 앞에 나타난 것은 뜬금없는 풍수술사들. 풍수의 기를 배우면 마구를 던질 수 있지만 그때마다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하나씩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리는 망설이면서도 마구를 배워서 투수로 데뷔한다.


주인공이 게이라는 데에서 편견을 가지시면 안됩니다. 이건 BL이나 야오이와는 백만광년쯤 떨어져 있거든요. 하지만 게이물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열혈물도 아닌 것 같고... 야구 만화도 아닙니다. 이게 야구 만화면 테니프리도 테니스 만화겠죠. 순애물? 판타지? 일단 소년만화인게 맞긴 한데 말이지요(아마도). 그냥 ‘야마다 레이지의 만화’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아니지, 야마다 레이지가 인어공주를 패러디하면 이런 만화가 된다는 느낌에 가까운가?
그림체가 좀 지저분한데요, 내용이나 설정에도 풍수니 야구니 가수니 전혀 안 어울리는 것들이 한데 섞여서 꽤나 정신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름 매력인 게, 그 와중에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확실하거든요. 그 말 하나 하려고 이렇게까지 잔가지가 많을 필요가 있었나 싶지만 이미 낚인 사람으로선 모두 군소리일 뿐입니다.

주인공들의 목적은 ‘고시엔에 가는 것’이지만, 히로나 히데오가 봤다면 분노할 정도로 이들의 야구는 엉망진창입니다. 작가 말따나, 고시엔에 가기 위해서 죽어라고 노력해온 수많은 야구 소년들의 꿈을 요상한 사기성 마구로 짓밟으려 하는게 주인공 팀이거든요. 고작 자신의 생일날짜 때문에 유리의 공을 절대 칠 수 없는 타자들의 운명이라니 스포츠 정신에 어긋난다구요.
토라키가 야구를 좋아했거나, 야구를 통한 야망이 있었던 거라면 이 이야기는 성립이 안 됩니다. 전자였다면 유리는 진작에 퇴출당했고, 후자였다면 제가 용서를 못했겠죠(;;;). 하지만 이 소년들의 목적은 고시엔에 진출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벗고 존재를 증명하려는데 있습니다. 그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했지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유리는 본래 고시엔에 갈 수 없는 토라키의 운명을 바꿔주고 싶어서(그리고 좋아하는 그이의 품에 한번 안겨보고 싶어서) 운동치인 주제에 투수를 맡게 됩니다. 하지만 운명을 바꾸는 대가로, 자신이 가진 음악의 재능을 하나씩 잃어가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런데 그래봤자 자기 사정으로도 벅찬 토라키는 아무것도 모르고, 게다가 완전히 노멀이라는 점이 클린히트.


“우리 집은 말야... 집은 있지만, 가족이 없어...
 부모님은 옛날부터 싸움만 하다가, 엄마는 내가 10살 때 집을 나갔고 아버지도 거의 집에 안 계셔.
 다같이 외출한 적도, 가족끼리의 오붓한 일요일도 내겐 없었어. 늘 가족이란 걸 동경했었지.
 하지만 난 게이야...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아이는 낳을 수 없어. 결혼도 못해.
 아무도 모르게 언젠가 혼자서...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가겠지...
 돌봐줄 가족도, 날 기억해줄 아이들도 없으니까...
 하지만 노래는 남아.
 중 2 때 모든게 다 싫어져서 신주쿠의 건물 옥상에서 구두를 벗었을 때
 어딘가에서 노래가 들려왔어.
 그 곡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죤 레논의 노래였어.
 그 때, 온 몸이 와들와들 떨려왔고 깨달았어. 이 세상에 내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로 곡을 남기면 되겠다고.
 가족은 없어도 사람의 마음에 남는 곡을 하나라도 남기면, 외톨이인 채로 죽어도 괜찮을 거라고... ”

“그... 그렇다면 더더욱 야구 따윈...”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처음엔 말야...
 ...........좋아하는 사람이
 날 필요로 해주었던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거든...”


8권까지는 스포일러랄 것도 없이 예상대로 진행됩니다. 유리는 모든 걸 잃고 빈껍데기만 남게 되지요. 읽으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서 수도 없이 회의를 했지만, 철저하게 부서진 순간부터 새로이 태어나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유리와 토라키의 마지막 육성대화를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꼽습니다만, 저는 아침해를 등지고 나타난 큐세이 야구전대(풉)가 더 인상깊어요. 그 순간, 설령 영원히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다시는 말을 할 수가 없어도,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이유를 알 수 없는,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젠 괜찮을 거라는 확신.

큐세이는 유리를 위해서, 유리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 다시 한번 고시엔에 도전하게 됩니다. 9권의 그 엔딩으로 완성되지 않았다면 <아가페이즈>는 지금같은 괴작이 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주인공을 궁지로 몰아넣고, 절망하고, 비극으로 끝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서 아침을 논하는 건 쉬운 게 아니지요.


어제의 의미없는 비명보다는 낫지만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질 못한 탓에 글이 잘 안 나오는군요. 우우우...
by 살아가자 | 2006/08/16 17:03 | 만화 | 트랙백(1) | 덧글(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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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프린세스 츄츄 at 2007/05/25 00:17

제목 : 아아아아아아아아악 아가페이즈으으으으으으!!!!!!!!
니가 이겼다 룽.... orz 어째 들고 오는 것마다 나를 격침시키니. 야마다 레이지 씨의 &lt;아가페이즈&gt;를 봤습니다. (각혈) 보는 내내 왠지 데자뷰가 느껴진다 싶었는데... 넷으로 찾아보니 예전에 친구의 추천으로 &lt;NG&gt;를 봤던 적이 있군요. 그때도 괴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쪽은 뭐;;; 완전 탈진. 만화에서 남자캐릭터에 반하는 건 일상다반사지만 정말로 몇몇 여자캐릭터들을 아끼는 것처럼 좋아하게 되기......more

Commented by 제스 at 2006/08/16 17:47
뭐.....뭔가 심하게 낚인듯한 기분이 듭니다만......ㅇ<-<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6/08/16 17:52
낚여주시면 감사하지요 ;ㅠ; 착불로 빌려드릴 용의도 있습니다만. <- 동지가 모자라 외로워 죽겠는 사람
Commented by 산이 at 2006/08/16 18:11
앗, 아가페이즈 읽으셨군요! 절판된 거라도 구하겠답시고 서점으로 출동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운 좋게 지인덕에 중고가격으로 새 책을 구했었지요) 이게 또 은근히 프린세스 츄츄랑 오버랩되는 바람에 아주 혼났습니다. 생각만 하면 그냥 안구에 습기가 그득그득 들어차는 것이...(먼 산) 한참 울면서 콘티짜던 기억도 새록새록...츄츄콘티와 함께 동결되었지만요. 아직까진 무척 아픈 작품들이어서 건드리기가 참 어렵더군요.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6/08/16 18:59
뮤토 미소를 한번 보겠다고 생고생을 한 아히루도 아히루지만, 노멀인 남자를 짝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빛나는 미래를 전부 내다버린 유리는 한 술 더 뜬다고 생각합니다 o<-< 세상에는 왜 이렇게 바보들이 많은 걸까요. 남자 캐릭터에게 이렇게까지 호감을 가져본 건 정말 드문 일인데...
산이님의 아가페이즈 콘티라니 무진장 궁금합니다!!!!!!!!!!!!!!!!!!!!! 아아악 이런 초절정 마이너 같으니...
Commented by 사이암 at 2006/08/16 19:01
이것 처음 나왔을 당시부터 너무 보고 싶었던 작품인데, 어디서 리뷰도 주워듣지를 못 해서 결국 아쉽게 흘려보냈던 녀석이로군요. 보고 싶네요!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6/08/16 19:06
읽은 직후에 검색엔진을 몽땅 동원해서 리뷰를 뒤졌는데, 맘에 드는 리뷰가 하나도 없어서 결국 제가 써보려...다가 보시다시피 장렬하게 실패했습니다. 아직 감정이 너무 많아요 ㅠ_ㅠ 릴랙스 릴랙스.
제가 빌려드릴께요 *_* 착불이건 데이트건 요청만 해주십쇼. .....한국판 번역이 심각하게 잘못되어 있기는 하지만요;;;
Commented at 2006/08/16 20:0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6/08/16 20:11
감사합니다;;; 완전 헷갈리고 있었어요 ㅠㅠ 수정하겠습니다.
Commented by 국수집 at 2006/08/16 20:36
저도 7, 8권 무렵에서 엉엉 울면서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후속작인 NG에서 유리가 스승님 역할로 나올 땐 정말 기뻣었지요.
이 작가도 매번 연재가 중간에서 빨리는것 같아서 으으 안습...
Commented by 헤니히 at 2006/08/16 21:32
꺄하하하하하핫!!!!!!!!!!!!!!!! 여러분 제가 낚았습니다! 잘했죠!!
저는 글을 못쓰니까 얼른 다른 사람 낚아서 감상글을 봐야한다니까요. 후훗(먼산)
저는 마지막에 희망보다는 조금 다른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었는데 아직 감이 안잡혔어요.(책이 누구씨네 댁에 가 있으므로)
헌신적인 사랑이 남기는것이 무엇인가를 조용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Commented by 르네이 at 2006/08/16 22:49
관심이 생겨서 검색해봤더니 NG 작가의 작품이었네요! *_*
근데 번역가가 박련;;;; 기대가 안됩니다 ㅇ<-<
Commented by Hylls at 2006/08/17 02:02
저도 언니님께 낚여서 죽어나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남동생도 엄청나게 감동먹었다며 오히려 코믹스를 녀석이 모았었죠 ㅇ<-<
Commented by 검은고양이 at 2006/08/17 03:57
아아.. 모르는 만화네요; ... 뭔가 모를 궁금증이 막 샘솟습니다!!
Commented by cinephile at 2006/08/17 09:31
젊은이의 꿈과 낭만 그리고 땀과 노력으로 얼룩진 갑자원이라는 마초적인 공간속에 고작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 공을 던지는 열혈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게이 기타리스트..완전 언벨런스의 극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빛나 보이는군요...예전에 '프린세스 나인'이란 작품을 주제로 갑자원 이데올로기라는 글을 기획, 또 실제로 모 만화동호회에 쓴적도 있지만 이 작품도 그런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좋은 범례가 될 수 있을듯..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6/08/17 11:29
안주인님 / 아아아아아악-----------
저 NG 봤었단 말입니다!!! 아주 옛날이지만 ㅠ_ㅠ 다시 보고 싶어요!!! 그때 못 알아봐서 미안 유리 orz

헤니히님 / (찌릿) 무슨 월척 낚은 낚시꾼이 강변에서 수상소감 외치는 것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 . .
나도 박련씨 번역판을 계속 보고 있자니 기가 빨린다. 원판이 어서 도착해야 할 텐데.

르네이님 / ......타격이 없다고 부정할 순 없겠지만, 진짜 명작은 아무리 번역이 날림이어도 전해지는 법입니다.

Hylls님 / 아아 휠스님도 보셨군요 ;ㅁ; 뭐야 역시 제가 풋사과였군요. 알만한 분들은 이미 다들 보신 것 같은데.

검은고양이님 / 구하기 어렵지만 꼭 보셨으면 합니다.

cinephile님 / 그렇군요... 야구만화 보면서 갑자원의 돌개바람(...H2)밖에 안 떠오르는 저지만, 말씀 듣고 보니 과연 그렇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가페이즈에 대해서도 써주시면 안 될까요? ;ㅁ;
Commented by 리안 at 2006/08/18 16:28
이거 저도 어디선가 리뷰보고 보고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살아가자님이 멋진 감상글을 남기셨군요. 근데..이것도 헤븐즈도어 류의 책인것 같아 좀 망설임이...OTL 나 또 그런 책 보면 헤어날 수 없어요. 크흑.. ㅜㅜ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6/08/21 17:30
음... 헤븐즈도어류는 아닙니다(히죽). 하지만 전혀 다른 방면에서 크리티컬이지요. 다음에 보여드릴게요 후후후.
Commented by 충격 at 2006/09/28 01:44
DP에 닉네임이 보이셔서 생각난 김에 간만에 블로그 한번 둘러보니..
아가페이즈에 낚이셨나 보군요. 여기도 외로움을 삭여드릴 동지 한명 있습니다.
아마 제가 한국에서 거의 선두그룹으로 낚인 인간일 듯 한데...
DP에서도 만화 추천해 달라는 류의 글에는 항상 숨겨진 진주로서 아가페이즈를 추천하고 있지요.

NG에 유리 말고도 제브라맨에 나츠오가 나온다던가 하는 식으로
이 작가의 작품은 거의 대부분의 작품이 세계관을 공유하며 스타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아가페이즈에도 다른 작품의 인물이 나오고요. 전체적으로 찾아보시면 꽤 재미있어요.
(불행하게도 아가페이즈만한 감흥을 안겨주는 작품은 다시는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대중적인 인기가 없어서 연재중단을 자주 당하는 작가이기도 한데...
아가페이즈도 사실 음양 2부 구성으로 뒷이야기가 더 있을 예정이었는데,
독자투표의 인기 부족으로 인해 철저히 음으로 떨어진 후 양의 시작을 보여주며 완결이 되었습니다.
(완성도면에서는 오히려 플러스가 되었을지도.)

어쨌든 그래서 결론은, 우테나 3쇄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응?)
Commented by 디온 at 2007/09/10 03:39
새거 구했어요 꺅꺅
코믹뱅크에 재고 남아있었어요 ㅠㅠㅠㅠ 비닐도 안 뜯어진 녀석들을 6천원(!!!!!!)에 새걸 모두 구입하고 나니 정말 날아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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