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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도망쳐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나는 에반게리온 키드이다. 열다섯 살에 「에반게리온」을 처음 접했고 고등학교 때까지의 내 유년시절은 모두 에바와 함께였다. 그때의 내게 에바는 쇼크였고, 절대적이었고, 그 이름대로 바이블이었다. 나는 이카리 신지의 고통을 완전히 내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질풍노도기라서 가능했던, 두번 다시는 그럴 수 없을 정도의 싱크로율. 신지는 나 자신이었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대적인 벽 안에서 에반게리온을 시청하는 것으로 나약하고 미숙한 자신을 연민했다. 한국의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내 주변도 신지가 처해있던 상황만큼이나 답답했기 때문이다.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 아무리 강한 힘을 손에 넣어도 바꿀 수 없는 현실세계. 그랬기 때문에 나는 TV판 에반게리온의 엔딩에서 울었고, 극장판 에반게리온조차 나름대로 소화해냈다. 에반게리온의 이야기는 나에게 있어 비판이 불가능한 진실이었다. 도망칠 수밖에 없는 신지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했으니까. 하지만 대학생이 된 후 내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다. 별의별 어려운 소리와 철학적인 얘기를 다 갖다붙히며 중딩 꼬맹이 앞에 잘난 척했던(?) 에반게리온이, 실은 정말 대책없는 작품이었다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뭐랄까 어릴 적 길을 잃었던 나를 인도해주겠다고 한 사람이 알고 보니 나와 똑같이 미아였다는 사실을 안 것 같은 느낌이었다. “속았다!”라는 말은 이럴 때를 위한 게 아닐까? 에반게리온이 이제 와서 저평가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때 얼마나 에바를 좋아했느냐면 일・미・한 DVD를 전부 모아서 가지고 있을 정도였다(다른 상품들은 이하 생략한다). 일본판 DVD는 세컨드 임팩트 박스와 한정발매 리뉴얼판 박스도 다 갖고 있었다. 학생 주제에. -_- 그것들을 모두 처분하고 이제 에반게리온의 치떨리는 기억은 지우기로 했다. 사람을 이끌어줄 듯이 잘난 척한 주제에, 길 위에 시청자를 버리고 간 그 대책없는 무책임함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두달쯤 전, 우연히 네이버 블로그에서 에반게리온 동인지 「Re-take」를 발견했다. 본 자리에서 다 읽어버린 후 부리나케 원판을 전부 질렀다. 남성향 18금이라는 사실이 많이 부담되긴 했지만 안 살 수가 없었다(세상에 내가 남성향 동인지를 내 돈 주고 사는 날이 올 줄은... orz). 이 내용은 그야말로 에반게리온에 인생을 망친 나를 위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토록 신지의 편이었던 나는 어느샌가 아스카의 입장에서 이 동인지를 보고 있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네가 그때 나에게, 시청자에게 어떤 테러를 가했는지 알기는 하냐면서 말이다. 신지는 정말 질릴 정도로 도망친 끝에 세계를 다 말아먹고, 그러고도 아스카 탓을 하며 목을 졸랐었다. 그야말로 ‘기분 더러워’였다. 그랬던 주제에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 신지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지금 도망치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그 기억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신지는 예전의 나약함과 우유부단함을 버리고 서툴게나마 세상에 맞서기 시작했다. 웃기는 얘기다. 이제 와서 그래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모두 끝나버린지도 십년이 다 되어가는데. 더이상 무슨 retake가 존재할 수 있을까. 인간이 무책임하면 어디까지 상황이(작품이) 망가질 수 있는지 실례를 보여줘놓고선. 그것은 신지라는 이름을 빌어 에바 제작진을 비난하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자신의 세계를, 레이의 세계를, 미사토의 세계를, 인류와 시청자의 세계를 90분만에 짓밟아버린 신지에게 그럴 자격은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9년이나 늦었지만 그에 책임을 지려 노력하는 신지의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다. 60억 인구를 내버렸던 주제에 단 한 사람 - 아스카를 위해서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결말은 진심으로 사람을 놀라게 했다. 아니 정말 이게 그 신지가 맞단 말인가? 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분명 아스카도 같은 심정이었겠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책임으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 - 책임을 지려고 노력하는 자세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것. 신지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결국 아스카의(나의) 입으로부터 “그래, 용서해줄게”라는 말을 끌어내고야 말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는 거지만 신지는 나를 기만했다기보다는 희생양이 아니었나 싶다. 신지를 비난했지만 동시에 나를 가둔 학교로부터, 사회로부터, 세계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했던 어릴 적의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렇지만 내게는 신지처럼 ‘도망치는데 쓰일’ 강대한 힘도 없었다. 끝까지 도망쳐서 세계를 멸망시킨 신지를 질투하고, 부러워하고, 멸시하는 것으로 나는 내 자신의 치부를 감췄다. 하지만 "나... 에바 파일럿으로 태어나서 다행이야." 실은 신지가 자신을 긍정하는 말 한마디가 듣고 싶었을 뿐이다. 도피한 세계에서가 아니라 당당히 현실에 맞서고 난 마지막 순간에서. 9년은 늦은 고백이었지만 그 말을 들을 수 있어서 진심으로 기뻤다. Re-take는 정말로 에반게리온 동인지이다. 에반게리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 에반게리온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이야기를 여기서 들려주고 있었다. 책임에 대한 이야기. 책임이라는 것에 대해서 철저하게 도망쳤던 에반게리온이기에, 자격은 없을지언정 누구보다 설득력있게 책임의 가치를 전할 수가 있다. 혹시 에반게리온이라는 작품의 의의는 거기에 있었던 것일까?(...) 9년 전 그 바닷가에서 버려졌던 아이로서, 신지와 아스카가 곤히 잠든 모습을 목격하는 것이 무척이나 기뻤다. 나와 같은 기억을 가진 모든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다. 그런데 18금 씬 때문에 페이지 넘기는 것도 괴롭고 흐름이 팍팍 끊긴다는 것이 문제 -_-; 스튜디오 KIMIGABUCHI는 전연령 관람가판을 발매하라! 발매하라! * 반면 같은 그룹의 다른 동인지들은 재미없었다. 케로로 중사 동인지 「빛의 나라」밖에 못 봤지만, 한번 했던 얘기를 재탕하는 것은 권장할 미덕이 아닐 뿐만 아니라 케로로는 이런 소릴 들을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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