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잃어버린 사회에서 - 「브이」review
2006년에 「26년」이 있었다면, 2007년에는 「브이」가 있다.

내가 DAUM에 연재 중인 웹툰 「브이」를 보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석 달 전, 5월이 다 끝나가던 즈음. 포털 DAUM 메인에는 웹툰이 업데이트될 때마다 일시적으로 작은 이미지가 뜨는데, 강풀님의 작품 말고는 무심히 보아넘기던 내 눈에 「브이」 31화의 컷이 들어왔던 것이다.

이유는 딱 하나.
미소녀였다 orz


그 작은 사각 컷을 가득 메운 채 고개를 틀어 나를 올려다보던 금발 미소녀에 혹한 나는 그 소녀를 클릭했고,
「브이」의 세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우선 작품에 대해서 설명해보자. 「브이」는 메카닉 웹툰이다. 내용은 무려 로보트 태권브이 그 이후 31년.
사실 나도 「브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 맨 먼저 태권브이를 연상하긴 했지만, 설마 진짜로 태권브이 관련일 거라고는 상상 못했다. 이 블로그 보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태권브이 후일담 동인지다. 2006년 9월, 시작은 아마추어 웹툰이었으나 지금은 (주)로보트태권브이의 공식 인가를 받은 연재물이다.

[지금으로부터 31년 전, 붉은별 제국에 맞서 지구를 지켜냈던 그때의 영웅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세상은 이미 태권브이를 새까맣게 잊었는데...]

이때 「브이」를 접하게 된 것은 어쩌면 운명일지도 몰랐다. 한참 국가폭력 & 한국 근대사와 씨름하면서 이런 내용을 어떻게 하면 이야기 속에 녹일 수 있을지 고민하던 내게, 「브이」는 정말 기가 막힌 모범답안 중에 하나였다.
왜 태권브이는 사라졌는가? 우리들의 영웅은 어디로 갔는가?
이 의문에 대해 작가는 너무도 기가 막힌 썰을 풀어놓는다. 지구를 지켜낸 뒤 조종사 김 훈의 손에 남겨진 태권브이라는 강력한 힘. 그를 노리는 한국의 독재자, 미국의 세력들. 멋도 모르고 들떠 있던 젊은 영웅 김 훈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고, 가족들이 고문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 끝에 결국 태권브이 조종사로서 입대하게 된다. 그러나 독재 반대 시위 탄압 현장에 태권브이가 파견되는 현실에 경악하고 좌절한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태권브이를 수장시켜 버리는 김 훈. 이후 정부에 의해 태권브이에 대한 이야기는 은폐되고 조작된다.
그리고 오랜 세월, 우리의 영웅은 자그마치 31년을 일반 회사원으로서 숨죽이며 살아왔다. 보고 있자면 너무도 설득력 있는 전개에 내 정신이 먼저 이상해질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현실로 존재하는 대한민국의 근대사에 깊은 한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로보트 태권브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6년. 박정희, 전두환 체제를 관통하면서, 더럽고 아픈 현실 속에서 악을 물리치는 한국의 영웅으로서 존재했던 태권브이에게 이만큼 어울리는 해석이 있을까. 정말 놀랐다. 감탄했다.
그리고 슬펐다.


"계급 같은 걸로 날 부르지 마! 내 이름은 김 훈이다!
태권브이의 유일한 조종사 김 훈!
책상머리에 앉아서 남의 운명을 멋대로 결정짓지 마!
나의 운명도 태권브이의 운명도 내가 결정한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이 장면에서 전편 통틀어 가장 강렬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한국 근대사가 안고 있는 70-80년대의 아픔이, 70-80년대를 지켰던 우리의 영웅을 통해 재현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것이 70-80년대의 흘러간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작 30년이다. 그때 아파했던 사람들, 지금도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붉은별 제국은 부활하고, 적은 공격해오고, 국가는 태권브이를 노린다.
이 모든 복수극을 보면서, 근래에 여러 번 일어났던 무차별 살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에 한을 품고 아무에게나 복수를 하는 무차별 살인. 유영철이 그랬고, 대구 지하철 방화가 그랬다. 그들이 한 짓을 미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런 고통의 싹을 틔우는 우리의 속도위반 사회가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 사회는 약자에게 너무도 냉담하다.
아니, 영웅에게도 그렇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는 영웅에 환호할 줄만 알았지, 그 영웅을 지켜줄 생각은 하지 못했다. 5월 광주의 꽃 전옥주 씨가 그 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아는가? 피를 흘리며 죽어간 수많은 청년들에게 무슨 보상을 하였는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가해자에 대한 처단조차 없었다. 개인에게 가해진 사회적 폭력은 고스란히 사회에게로, 개인에게로 돌아온다. 이만큼 피를 흘렸는데, 그래서 좀 나아진 삶을 산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절을 살은 사람들의 상처가 낫질 않는다. 피고름이 계속 흘러내리는 것이다.

정말... 아팠다.
나는 80년대생이라 전두환 체제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로보트 태권브이를 보지도 못한 세대이다. 부모님의 피를 먹고 자란 민주주의의 열매만 맛본 세대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접할 때마다 막막하고 가슴이 아프다. 이게 절대로 끝난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닥치는대로 공부했다. 솔직히, 한국 근대사를 읽을 때마다 세상이 십몇년 사이에 이렇게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에 환호했고,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 참 편리한 것만 봤다. 결국 진정한 어둠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아래 포스트에도 썼었지만 대책이 안 선다.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참으로 비교하기 쑥스럽지만) 내 글 같은 경우 당장 고통받는 것이 아키라 개인뿐이었으니까 어떻게 수습이 가능(?)했는데, 지금 「브이」에서는 사회 전체가 요동치고 있다. 상황은 클래이맥스로 치닫고 있다. 잘라 말해서, 갈수록 막장이다. 희망이 보이질 않는다. 독자인 내가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희망이 보이질 않으니까. 당장 대선 때 누굴 찍어야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믿고 싶다.
제피가루 님이 보여줄 미래를.
상처가 깊은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피흘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그때보다는 조금 나아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잊지 않는다. 나와 우리 부모님의 영웅을.


포털 DAUM 웹툰 [ 브이 ]


p.s : 네러티브 구성에 너무 감탄을 하다 보니 말할 기회를 놓쳤는데, 메카닉 액션 연출도 죽음입니다. 보면서 입을 다물지를 못했습니다. 한국이 발전시킨 웹툰 스크롤 연출이 여기까지 왔구나 싶었어요. 특히 한강에서 문어발 로봇과 격투 벌이는 부분. 익숙한 조형물들이 배경에 나오는 걸 보면서 눈물을 좍좍 뽑았습니다.
그래! 이거야 이거! 이런 게 보고 싶었다고!!! 63빌딩 나오고! 남산타워 나오고! 국회의사당 작살내고!!!

by 살아가자 | 2007/09/01 21:37 | 만화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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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DAIN at 2007/09/01 22:11
개인적으론 선을 넘어버린 물건이란 생각 뿐이라서. 오리지날에서 어떤걸 어떻게 고쳐도 역시 광주 같은 데에 끌어들이지는 말았어야 합니다.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7/09/01 22:52
DAIN님은 그러셨군요. 사람마다 현실과 판타지를 조합하는 데에 대한 내면의 룰이 다른 거니까요.
Commented by 호크윈드 at 2007/09/01 23:31
정통 후계작이라고는 도저히 인정은 못하겠습니다만 동인작품 혹은 외전으로서는 상당한 퀄리티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7/09/02 07:20
앗 호크윈드님 안녕하세요!
그렇군요. 역시 원작(?)을 보고 싶네요. 저 같은 사람에게 태권브이를 홍보한다는 의미에서도 좋은 작품이었다고 생각해요.
Commented by twenty at 2007/09/02 12:39
덕분에 전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좋은 작품 가르쳐 주셔서 감사해요^^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7/09/04 22:25
재미있게 보셨다니 기쁘네요 ^^ 데헷. <-...
Commented by 존다리안 at 2007/09/04 23:29
저도 호크윈드님과 마찬가지로 정통 후계작이라고 인정은 못합니다.
그래도 최소한 주식회사 태권브이 판권으로 나오는 물건이라는 점에서는 위안을 삼긴 합니다.
Commented by 루다날개 at 2007/09/05 00:57
사실 살아가자님의 포스트를 보고 지난 주말을 틈타 이 작품의 최근 연재분까지 다 읽었습니다.
우선 개인적인 호불호를 떠나 작품 자체의 완성도가 상당하다는 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러티브도 탄탄할 뿐더러 무엇보다 설정의 현실감과 설득력이 상당합니다.
원작 자체가 이미 SF 로봇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하지만 이 작품이 담고 있는 감성에는 아무래도 공감이 가질 않더군요.
그래서 원인이 뭘까...하고 생각해 보니 이 작품은 바로 영화 '괴물'과 거의 일맥상통하는 정서를 담고 있다는데까지 생각이 다달았습니다.

이 작품을 보고 느꼈던 일종의 낯설은 씁쓸함은 바로 영화 '괴물'에도 전반에 깔려있는, '패배주의 정서'였습니다.
패배주의로부터 비롯한 무력감.

바로 그 점이 제 개인적인 공감을 얻을 수 없는 부분이였고,
만화가 강풀의 작품들에서 엿볼 수 있는 '당장 손에 쥘 수 없는 희망이지만 그것을 향한 강한 의지'와 가장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패배주의가 열등하다던가, 이렇기 때문에 작품이 뒤떨어진다던가 하는 뜻은 절대로 아니니 오해하시는 분은 없으시길 바라고,
다만 제 기준에서 공감할 수 있는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의 정서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싶었습니다.
Commented by 인생유전 at 2007/09/05 08:58
전 거의 열광하면서 보는 중입니다~ 사실 저 자신도 <태권V>의 뒷 이야기 - 그러니까 이 작품만큼은 아니어도 꽤 시간이 흐른 후의 훈, 영희, 철이, 메리 등등 일종의 후일담(?)같은 이야기를 구상하고 있었는데요... 이 작품 보고는 orz하고 시놉 찢어버렸다는...;;; (쿨럭;)

루다날개 / <괴물>도 그렇고 이 만화도 그렇고, 그런 "패배주의" 정서가 더욱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일갈하는 면으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비관적이긴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를 제대로 반영해 주고 있다고 생각해.

하여튼 이 작품은 제가 생각하기에도 여러가지 면에서 의미가 큽니다.
Commented by 호크윈드 at 2007/09/06 01:48
남의 포스팅에 덧글을 계속 다는 것은 죄송합니다만...
루다날개 / 패배주의 정서 라기 보다는 오히려 블랙유머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보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괴물도 마찬가지죠. 패배주의 정서라기 보다는 블랙유머입니다.

살아가자 / 원작의 정통 계승작이라고 보지 못하는 이유는 저에게는 두어가지가 있습니다만...
1. 태권브이의 후계작들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솔직히 84 태권브이 같은 괴작들은 버리더라도 "우주작전", "수중특공대" 그리고 "우주전함 거북선"으로 이어지는 정통 태권브이의 작품을 모두 전제로 삼고 이야기를 만들었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태권브이 1편만을 기준으로 보고 그 이후의 이야기를 만든 것이라는 것이 아쉬운 점입니다. 메리의 행방이나 이런 것은 우주작전과 수중특공대를 보면 많이 생각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 부분들입니다.
2. 호오의 문제도 있습니다만 저는 과거의 캐릭터를 망가뜨린 면이 좀 싫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의 후일담이라지만 훈이는 사실 저렇게 된다해도 납득이 갑니다. 하지만 영희와 철이의 모습은 저에게는 납득이 전혀 가지 못합니다. 영희는 좀 더 정의감과 자존감과 자신감이 강한 여성이었었습니다. 최소한 아줌마가 되더라도 저런 그냥 아줌마는 아니었을 꺼라고 생각이 드네요. 한성깔 하는 몸짱 아줌마? 내지는 꽤 커리어 워먼? 철이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아무리 인생 역경 어쩌고 해도 최근 편수의 삐뚤어진 모습은 납득할 수 없습니다. 철이는 좀 더 심지가 굳고 진짜로진짜로진짜로 착한 아이였습니다.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7/09/06 07:48
존다리안님 / 그렇군요. 태권브이 프로젝트는 계속되고 있으니까요.

루다날개님 / 먼저 몰라뵈서 죄송하고요 ㅠㅠ;; 좀 봐주세용.
저는 이 작품이 패배주의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이러한 현실을 보여줌으로서 희망을 찾으려고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곧 나올 결말을 기대하고 있답니다.

인생유전님 / 좋아하셨군요! 그 시놉 궁금한데 찢어버리시다니 ;ㅁ;
저는 이 작품이 태권브이 후일담이라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원작도 못 봤고 orz) 한국 근대사를 어떤 식으로 판타지에 녹여내는가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보여준 것 같아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것도 유전님이 말씀하시는 '여러가지 면'에 해당이 될까요?

호크윈드님 / 아니 무슨 말씀을 ^^
그렇군요. 사실 영희의 캐릭터는 제게도 좀 그렇긴 했습니다 ^^; 훈이가 '유일한 조종사 운운...' 할 때 태클 걸고 싶었어요. 본 적은 없지만 한국 최초 여조종사니 멋진 언니였을 텐데.
결국, 위의 유전님 답글에도 적었지만 제가 이 작품에 반한 것은 이것이 '태권브이'여서라기보다는, 태권브이를 소재로 삼아 색다른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기존의 태권브이 팬들이 태권브이를 소재화하여 여러 요소들을 새로운 이야기에 맞게 뜯어고친 이 작품을 마냥 좋아하기는 힘드신 게 당연하겠지요. 팬인걸요.
아...아니 단순히 제가 동인지를 즐기는 방식에 익숙해져서 그런 걸지도.... 가능성있다?! ;ㅁ;
Commented by 루다날개 at 2007/09/07 01:37
살아가자//못 봐드리겠어요 ㅎㅎㅎ
아니아니 사실은 의도적으로 슬쩍 숨기고 있던 면도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제가 사과드려야죠.
괜시리 놀라게 해드렸으니 ^^;

그리고 '브이' 얘기에 대해서는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따로 기회를 마련하죠 ^^
짧은 글로 설명하려니 제 표현력의 한계 때문에 어려움이 많구요.
그렇다고 적당히 넘어가려니 많이 아쉽습니다.


호크윈드//음... 듣는 분들로 하여금 충분히 오해를 살만한 표현이였기 때문에 변명하기 민망합니다만;
제가 씁쓸하게 느꼈던 부분은 불편한 현실에 대한 직시나 블랙 유머가 아니라, 작가가 현실을 보는 눈 자체에 대한 불만이였다고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요것도 충분한 설명이 안됩니다만 감성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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