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 게임에서 구현되는 [운명]의 형태 - 토가이누를 사례로
+ 응원 리플 주신 분들께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ㅠㅠ;;; 주말 동안 답글 다 달도록 하겠습니다.


[레트로액티브]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히치하이킹해서 잡아탄 차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을 목격한 여주인공이, 근처에 있던 시간 연구소로 흘러들어가 시간을 되돌려서 살인사건을 막아보려는 내용의 영화입니다. 그러나 (아마 짐작하시겠지만) 벌어질 사건을 미리 알고 막으려 할수록, 시간을 다시 돌리고 돌릴수록, 사태는 더더욱 악화되기만 하지요. 반복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사건에 휘말려서 죽게 됩니다.

아키라에게 주어진 운명은 절대적이면서 동시에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절대적이지 않은 부분은 '선택'입니다. 아키라의 선택에 따라서 다가오는 미래도 달라집니다.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아키라의 운명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반면 절대적인 부분은 '미래는 단 하나뿐'이라는 점입니다. 아키라는 단 하나의 미래만을 겪을 수 있으며, 가능성을 품고 있었던 여러 미래를 볼 수 있는 것은 아키라가 아닌 플레이어입니다. 그리하여 아키라가 선택하게 되는 미래는 '절대적인 운명'이 됩니다.

설명이 장황해졌는데;;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만일 아키라에게 시간을 돌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즉, 단 하나의 미래가 아닌, 여러 미래를 하나의 아키라가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된다면?
케이스케를 잃고 절망한 아키라가, '그때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걸'이라는 일념으로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사실 이것은 [토가이누의 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간이 시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한, 후회라는 감정을 가슴 속에 품고 사는 한 영원히 반복되는 미련입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이런 해묵은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제가 루트 게임이라는 형식에 익숙하지 않아서일지도요. 가변적이면서 절대적인 운명을 구현하는... 독특한 형식이라 더 흥미가 갑니다.(제대로 살려내는 게임은 몇개 안된다고 듣긴 했습니다만)

그런데 제 상상 속에서는, 아키라에게 '다시 선택할 기회가 주어질 경우' 도저히 괜찮은 전개가 나오질 않습니다. 가령 이런 식입니다. 케이스케를 구하겠다고 돌아간 아키라는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예전과 다른 선택을 계속하다가 린과 친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린의 아픔과 과거를 알게 되고, 케이스케와 린을 동시에 구하려고 하다가 둘 다 잃고 마는 거지요. 그래서 다시 선택의 순간으로 돌아가지만, 또 다른 선택을 하다가 모토미건 시키건 나노건 누군가와 접촉하게 되고, 다시 그들을 이해하게 되고, 정을 붙이게 되고, 구하려고 하지만.... 그리고 무한반복.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같은 사람인 동시에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가능성 중에는 시키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아키라가 있고, 케이스케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아키라도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아키라이지만, 시간대와 상황에 따라서 완전히 같은 사람일 수는 없게 됩니다. 당연히 소중히 여기는 것도 다르고, 그것을 동시에 충족시키려 하니 충돌이 발생하고 이것저것 헝클어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당장 잃어버린 순간에는 무척 괴롭겠지만 일단 넘어가고 나면 또 다른 소중한 무언가가 생기고, 그러면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가지는 우선 순위는 달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과거의 선택에 얽매여서 그에 집착하고, 한사코 바꾸려고 해봤자 일은 꼬이기만 하고 나아지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너무 많은 가능성을 알게 되고, 그 가능성들의 장단점 앞에서 헤매이게 되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볼까요. 케이스케 엔딩에서의 아키라는 케이스케를 버리면서까지 나노를 구하는 선택지는 도저히 택할 수 없을 겁니다. '그 아키라'에게는 케이스케가 가장 소중한 존재니까요. 하지만 나노 엔딩의 아키라라면, 케이스케의 죽음은 여전히 아픈 상처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왜냐면 그것은 이미 지나간 과거로서 체념했으며, '그 아키라'로서는 나노가 가장 소중한 존재거든요. 물론 둘 다 살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그게 불가능하고 둘 중에 하나만 살릴 수 있는 운명이라고 칠 때의 얘기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설령 둘 다 살리는 선택이 가능했다고 해도 그것이 과연 베스트일지는 가보지 않고는 모르는 노릇입니다. 둘 다 데리고 나왔더니만 몇 개월 뒤 신주쿠 2번가에서 게이 삼각관계 치정극으로 몰살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결말일지 누가 알아요.

그래서 시간의 길은 일방통행입니다. U턴은 불가능합니다. 그냥 앞으로 걸어가는 것 외에 도리가 없습니다. 남겨지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최적의 조건입니다. 다른 가능성의 결말을 알 수 없다는 것은 분명 축복일 겁니다. 후회스런 일이 있어도, 그냥 묵묵히 걷다가 돌아보면 어느새 그것조차도 지금 내가 살아가기 위한 디딤돌로 변해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후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다면, 그 후회하는 순간에 사로잡혀서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수정하려고 애쓰다가 끝내 파멸하게 되지 않았을까요.

제게도 선택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고, 어쩌면 만화가 아니라 자동차에 미쳐서 목숨을 거는 미래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자동차광이 된 살아가자의 미래'에는 엄청 큰 돈을 벌거나 크게 성공하거나 하는 식의 '해피엔딩'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랬다고 하더라도 그 미래는 지금의 제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 이미 만화를 좋아하게 되어버렸으니까. 그런 해피엔딩은 관심 없으니까. 때때로 아쉬울지는 몰라도, 이 길에 익숙해져 버린 뒤니까요. 아무리 힘들고 아픈 상처가 있어도, 그걸 감수하고 받아들일 만큼의 가치가 지금 제가 붙잡은 미래에 있는 거니까요.
케이스케의 죽음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시키를 선택한 아키라에게, 린을 선택한 아키라에게, 모토미를 선택한 아키라에게, 나노를 선택한 아키라에게 있는 것처럼.
케이스케와 웃고 있는 미래가 시키 ED1의 아키라에게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을까요. 아무리 자신이 행복해보인다고 해도, 그런건 이쪽의 아키라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이 아키라에게는 시키가 있으니까요. 이쯤 되면 지금이 고통스럽다든가 괴롭다든가 하는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지금의 내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죠.


p.s : 그래서 전 뭔 소릴 하고 싶었던 걸까요 ㅠ.ㅠ 횡설수설해서 뭔 얘긴지 모르겠어요 누가 석줄 요약 좀 해주세요 orz
by 살아가자 | 2007/09/29 00:19 | 올망졸망 | 트랙백 | 덧글(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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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ranigud at 2007/09/29 09:44
음.... '지금이 최악이다'라고 생각할 때는 아직 최악이 아니다?


///// 죄송합니다; 더 이상한 말이 되어버렸네요;
Commented by 미르 at 2007/09/29 10:13
에에, 안녕하세요. 처음뵙겠습니다. (꾸벅)

조금 뜬금없지만; 이 포스팅을 읽다보니 문득 어떤 NT노벨이 생각나네요. 제목이 'All you need is kill' 이라는 소설이었는데 거기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전투가 시작되기 전의 30시간을 무한히 반복하게 된 어느 초년병의 이야기였습니다만. 어딘가 루트 게임을 반복하는 것과 비슷한 설정이었던지라. ^^; 책 자체도 꽤 재미있었으니 한번쯤 읽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7/09/29 12:12
ranigud님 / 오랜만에 뵙습니다 //ㅁ//
지나고 나면 어떤 과거든 비슷해지는 것 같아서요. 웅... 그런데 여전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orz

미르님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재미있어 보이는 내용이네요.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투도 아니고 전투가 시작되기 전의 30시간이라니... 이 무슨 무시무시한 설정;
Commented by 미르 at 2007/09/29 13:46
아, 전투도 포함해서 30시간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공이 죽기 전 30시간이라고 해야 할까요; (삐질삐질;) 따져보면 상당히 암울한 내용이긴 한데 그렇게까지 무겁진 않아요. 아니 그러니까 어두운 분위기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암담한 느낌은 없달까... 뭔 소리 하는 거지, 나. (...)
Commented by ranigud at 2007/09/30 11:19
하고 싶었던 얘기는...

지금이 최악이라고 생각해서 과거를 바꾼다고 해도, 결국은 더 최악의 상태가 되기 마련이고... 사실상 지나고 나서 그 지난일에 대해 후회가 남을 수는 있겠지만, 그 상황에서 인간은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하게 되는 거 같아요. ㅇㅅㅇ
그러니까... 지난 과거를 고칠 힘이 있다고 해도, 그건 '최악'이 아니라 '최선'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ㅂ' 결론적으로는... 현재의 소중한 것에 충실하자...? 정도......?;;;;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7/09/30 16:21
미르님 / 음... 그렇군요. 소재가 암울해도 무겁지 않게 쓰는 것이 라이트노벨의 특징이니까요. ^^

ranigud님 / 이렇게 정신없는 글인데도 힘써 요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_orz
예를 들면 이런 거겠죠. 시간을 돌려서 중요한 시험 같은 걸 다시 볼 수 있다고 했을때, 과연 몇점이 나와야 '만족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을까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데, 그런 식으로 반복하다 보면 결국 가장 끔찍한 순간만 반복하면서 얽매여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외로 그런 건 지나고 나면 그렇게 중요한 분기가 아닐 수 있는데도.
Commented by 인생유전 at 2007/10/02 16:30
※ 제멋대로 세줄 요약~*^^*
1. 언제나 수많은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우리에게 선택 가능한 것은 정해져 있다.
2. 그 많은 가능성들 중에서도 지금, 바로, 현재 행한 선택이 늘 그때그때 최선의 것이 아닐까?
3. 가지 않은 길을 돌아보며 후회하기 보다는 우리가 걸어온 길이 최선이라 믿고 꾸준히 가 보자!

... 가끔 <토가이누의 피>가 살아가자님께 던진 가장 중요한 '화두'는 과연 무엇일까 하고 궁금하게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만, 지금 그 해답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취하는 선택 - "결단"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순간의 결정들이, 우리 자신의 삶을 과연 어떻게 어느 정도나 좌우하는 것일까요. 어찌 보면 '모든 선택이 다' 영향을 끼친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_+
제 블로그에도 올렸었는데요~^^a 법륜스님의 글 중에서 "과거에 맺힌 것들을 풀고 지우려 노력하기 보다는 앞으로 이와 같은 일로 마음에 금이 가게 한다거나 잘못된 일들이 맺히지 않게 정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미래뿐 아니라 과거도 달라지는 것이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결국 과거의 선택이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는 그에 수반된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가꾸어 나가느냐에 따라 항상 다르게 보여질 것 같아요.
그 과거에서 이어진 현재가 행복하고 미래가 희망적이라면, 어떤 선택이건 잘된 거라 느껴지겠지만... 그 반대라면? 과거의 어느 순간인가를 계속 탓하고 있을지도 모르죠.^ㅅ^a 그러니 과거로 인해 현재와 미래가 달라지는 것 뿐만이 아니라 현재 그리고 미래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과거" 자체도 늘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에고, 이거 뭐 쓰다 보니까 별 잡소리가 다 나오는군요.^^; 각설하고... 이 포스트를 보면서 떠오른 시가 있어서요, 제가 참 좋아하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입니다.


노란 숲 속에 두 갈래로 난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나 봅니다.
그 길을 걸으므로써,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맞닿아 끝없으므로
내가 언젠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멀고 먼 훗날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세줄 요약 한답시고 나섰던 주제에 엄청시리 긴 주저리만 달아놓아 죄송합니다! =ㅁ=;)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7/10/02 22:55
유전님 감사합니다 >ㅁ< 제 잡문보다 유전님의 글이 훨씬 알기 쉽고 정리되어 있어서 부끄럽습니다 ㅠㅠ
그리고 써주신 그 영시는 저도 엄청 좋아해요! 어느 정도로 좋아하는가 하면, 원문을 일기장 첫머리에 적어놨을 정도로 *^^*
이런 제멋대로인 글을 끝까지 읽어주시고 받아주신 것에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좀 부끄럽긴 하지만 ;ㅁ;
Commented by 은여 at 2007/10/04 16:06
안녕하세요. 오랫만에 와서 글 잠시 남겨봅니다.

토가이누의 피는 플레이 하지 않았습니다. 몇몇 루트 선택 계열의 플레이를 해봤으니까요. 시간의 흐름이 일방적이라는 말에는 상당히 공감합니다. 루트마다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소중한 것, 혹은 선택해야 하는 가치관은 조금씩 다르니까요. 그 상황에서 다른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캐릭터 자체의 모순이 될 뿐더러 어쩌면 비관적인 엔딩이 만들어질 가능성을 새로 여는 것이니까요.

루트게임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 설정은 평행 세계설입니다. 과학적으로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만, 이런 계열의 게임들은 각자가, '선택지에서 뻗어나가는 가능성'을 주인공, 혹은 플레이어에게 '선택'하게 만듭니다. 게임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소소한 선택과 선택들이 수만가지의 미래로의 길을 열어나가고, 우리는 그 하나를 선택한 지금에 있습니다. 그것이 토가이누의 피 뿐만이 아닌 이런 게임들이 기본적으로 말하려는 것 아닐까요.

...뭔가 두서없는 글이 되었습니다. 여튼 글 잘 보고 갑니다^^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7/10/06 10:19
은여님 / 감사합니다! ^^
제 경우 이런 류의 게임은, 특히 올클리어해야 사건의 전모가 보이는 시스템은 토가이누가 처음이라 인상 깊었답니다.
어쩐지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런 것을 게임으로 구현할 수 있다니 게임이란 정말 매력적인 것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나이가 되어서야 그걸 깨닫다니.... 이런 바보.
저도 써주신 답글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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