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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한지 4개월이 지났다.
오늘 전철을 타고 가다가 '그러고보니 최근 애니메이션을 전혀 안 봤군...' 하고 새삼 깨달았다. 볼 새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왠지 충격이었다. 예전에는 정말로 '하루라도 안 보면 죽을 것 같던' 시절이 있었는데. 입사 초기에는 오프라인의 직장과 온라인의 기타 활동을 다 병행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점차 점차 남는 시간도 대부분 업무에 투여하게 되었다. 애초에 남는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요새 출판사에서 일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어쩌다 그리로 빠졌냐고? 사연은 참 구구하지만 요약하자면 동인지 좀 새끈하게 만들어보려고 출판 교육을 받다가 정신 차려보니 취직되어 있었다. 입사했을 때의 나는 그야말로 무장해제 상태였다.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직장은 만화+애니랑 전혀 상관없는 곳인데다 일본어도 거의 쓸 일이 없으니까. 내 오프라인 친구들은 잘 알 것이다. 내게서 만화랑 애니 등등을 빼면 시체라는 걸. 그나마 장점으로 분류되는 열정이나 추진력이 그 외의 영역에서 분출된 적은 거의 없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내겐 아무것도 없었다. 빈껍데기였다. 실무 능력은 하나도 없고 주제에 순진하고 착하기만 한, 커피 하나 끓여올 줄 모르는, 한마디로 ABC도 안 되어 있는 20대 초딩이 나였던 것이다. 팀장님이 날 교육시키느라 진땀을 빼셨다... 아니 빼고 계신다. (이 블로그 방문자 중 어쩌면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내 비전은 이 험난한 시장에서 재미있는 만화를 그리는 분들을 최대한 지켜주는 (유능한) 편집자가 되는 것이었다. 아직 그 꿈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문장이 과거형인 이유는, 모든 것이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잘 모르겠다. 편집자의 역할은 그런게 아니다.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곳은 만화판이 아니지만, 더 심하면 심했지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짧게나마 편집자 흉내를 내면서 깨달은 것이 몇 가지 있는데 1. 글 잘 쓰는 사람이 프로 작가가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과 2. 편집자는 철저하게 대리모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작가 중에는 글을 엄청 잘 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필수 조건은 아니다. 원고 만지다 보면 이렇게 전개가 개연성이 없는데 스스로 창피하지 않은걸까 싶은 글도 있다. 프로 작가는 그냥, 먼저 되는 놈이 이기는 거다. 역시 호노오 선생님의 말씀이 그른게 하나도 없다. "그림은 멋지지만, 프로 만화가가 아닌 놈은 널렸다!!! 프로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디테일도 펜선도 아니다! 그런 건 하다보면 다 하게 되어 있어!! 요는 되면 장땡이다!!!" by 호노오 모유류, <울어라 펜>에서 그리고, 대리모로서의 편집자. 편집 일을 하면서 내 안에 있던 두 가지 부류의 자존심은 처절하게 깨졌다. 하나는, 내가 이 회사에서 전혀 몸값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 초짜니까 당연하지... 라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열정이 없다구!!! 완전히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내가 얼마나 쓸모 없는 인간인지 느낄 때마다 자괴감이 든다. 나 같은 사원을 덜컥 맡아서 가르치고 있는 팀장님이랑 선배님께도 너무 죄송하고... 이걸 극복하고 싶어서, 여가 시간을 빼서 회사 일에 쏟았다. 그렇지만 잘 안 된다. 내 안에 열정이 없다보니 시간을 퍼부어도 집중력이 떨어진다;;; 결국 내 열정은 팬심에만 발동되는 그 정도의 것인가? ....당연하다고?;; 또 하나는, 글쓰는 것에 대한 자존심. 요새 글을 도통 쓰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인데...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괴롭다. 애니는 아예 못 보고 있으니 그렇다치고, 그 무엇을 보아도 내 안의 감정이 글로서 흘러나오질 않는다. 이제까지는 뭔가에 감동했을 때, 참을 수 없도록 감상문이 쓰고 싶어질 때 글을 썼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매일 당기지 않는 텍스트를 주물럭거리고 있다 보면 글자 자체에 물려버린다. 회사에서는 매일 글을 쓴다. 하지만 그 글에는 내가 없다. '자신을 죽인 글'이다. 재미없다고 생각되는 책이라도, 별로라고 생각되는 책이라도, 추천글과 홍보문은 무조건 써야 한다. 어떻게? 거짓말로 쓰는 거지 뭐;;; 그러다보니 끝도 없이 빠꾸를 먹는다. 나는 그렇다치고 봐주시는 팀장님이 지치신다. 이제까지 내가 글을 잘 쓴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거기에 자존심이 깃들여 있다고는 더더욱 생각지 못했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냥 글쟁이로서의 자각이 없었던 것뿐이다. 그냥 감상문이라고 해도 20년을 끄적여온 글줄인데 거기에 자존심이 없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계속 '내가 없는' 글을 쓰고 쓰고 또 쓰다보니 내게 없(다고 생각했)던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존심이 비명을 지르더라. 하지만 그게 편집자의 역할이다. 싫으면 작가를 하면 된다. (아니... 사실 작가라도, 프로는 정말 대작가가 아닌 담에야 '시장을 위한 글'을 쓰게 되지만) * 그래서 아마추어 시장이 따뜻한.. 혹은 미지근한 거다. 그냥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면 되고, 그것이 그대로 가치를 존중받으니까. 존중하지 않겠다는 사람에게는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라는 마법의 주문으로 배리어를 치면 되고. 난 그런 동인계가 (좀 깨긴 해도)좋았다. 지금도 좋아하긴 하지만...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겠다. 사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반적으로 다 불투명해 보인다. 내 미래도 감정도 무엇 하나 예측할 수가 없다. '변하지 않을 거라고' 믿던 시절은 지나갔고, 그 사실이 안타깝거나 아쉽지도 않다. 우리 회사 디자이너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림은 자기 예술을 하는 거지만, 디자인은 모두를 위한 거라고. 마찬가지다. 나를 위한 책을 만드는게 아니라 독자를 위한 책을 만드는 것. 그 갭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동안 받은 회사 스트레스의 대부분은 저 두 가지에서 왔던 것 같다. 그 때문에 월요병 증상 생기고(차라리 주말에도 계속 출근하는게 속 편했다) 머리도 확 잘라버리고 두문불출하고 몸은 삐걱거리고 킬로수는 빠지고... 지금은 어떻냐고? 전자는 여전하다. 이건 시간으로 메꾸는 수밖에 없어보인다. 후자는 체념해가는 중인 것 같다. 그러니까 이렇게 끄적이는 잡문이라도 쓸 수 있는 거겠지. 지난 몇 달 동안 자존감이 땅에 떨어지고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ㅇㅇ님 ㄹ님 ㅊㅅ님 ㄷㄹㄹ님이 건네주신 말들이 큰 힘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지난 4개월간의 제 자존감은 님들에게 빚졌습니다. (이 글을 삼키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위 문장을 쓰고 싶어서 라는 이유가 80% 정도... 헤헤;) 그러고 지내다가 문득, 오늘 집에 오고 가는 길에서 깨달은 거다. 애니메이션 안 본지 오래됐다고. 그 사실을 못 느끼고 있었다니. 사실 4개월이나 지났다는 것도 실감이 안 난다. 아직도 나는 맨날 팀장님께 야단맞고 있고 왕초보 티도 전혀 벗지 못했다. 내가 처음에 품었던 비전. 한때는 정말 그것만을 생각했었다. 면접 보러 가서 5분 동안 자기소개 하고 25분 동안 그 얘기를 했을 정도로(야 이 바보야... orz). 그런 것치고는 별로 공부도 안 하고 노력도 안 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만화들이 시장에 나오도록 돕고 싶다는 꿈만은 갖고 있었다. 사실 라노베 쪽으로 갈 기회도 있었는데 일부러 이쪽으로 왔었다. 일반 시장에서 확실하게 공부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때는 내가 만화랑 애니를 안 보고도 살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얼마나 먼 길을 돌고 있는 것일까. 겨우 초보 티를 조금 벗는 날이 오더라도, 그때에는 어쩌면 이런 꿈이 걍 잊혀져서 한때의 혈기로 회상하는 추억의 한토막이 될 지도 모른다. 만화 따윈 잊고 열심히 ***책만 만들고 있을지도? 그때가 되면 아쉬움도 없을 거다. 내가 문학소녀로 날렸던(?) 초딩 시절을 아쉬워하지 않는 것처럼, 미래의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과 지금의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이 같으란 법은 없으니까. 그런 나도 그다지 싫지는 않다. 그래 어쩔 수 없었겠지 하고 동정심마저 든다. 지금도, 이런 비관적(?) 예측을 하고 있는 지금도 그다지 슬프지는 않다. 그냥 그렇게 되면 되는 거지 뭐 하는 기분. 단지 한 가지 궁금한 것은 있다. 안 되면 죽을 것 같았던 그 열정은 어디로 갔을까? JAM PROJECT 5집이 서글프게 들리면 막장인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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