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중학생의 문화를 길어올리다 「우리들의 스캔들」
우리들의 스캔들
이현 지음 / 창비(창작과비평사)






내가 읽었던 책 중에 중고등학생(14세~19세)이 주인공인 국내소설이 뭐가 있었더라?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내가 어릴 때 즐겨 읽었던 '소년소녀소설'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나이는 대개 10-13세였던 것 같다. 그것도 대체로 해외문학이었다. 계몽사소년소녀전집이나 ABE 시리즈 같은. 그 와중에 소중애 선생님의 동화만이 내 가슴속의 보배였다. [연변에서 온 이모]는 지금도 소중히 끌어안고 산다. 소중애 선생님 것은 아니지만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도 소장품이었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면서 나는 책과 멀어지고 대신 중고등학생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화의 세계에 푹 빠졌다.
이러한 과정을 경험한 게 나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서적 시장이라는 것은 없다고들 한다. 다들 입시 준비에 바빠서 그런 걸 읽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그런 건 다 핑계일 뿐이다. 입시가 닥치건 사시가 닥치건 인간은 하고 싶은 걸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읽고 싶은 게 없었을 뿐이다. 우리에게 읽을 게 뭐가 있었지? 중고등학생에게 추천되는 서적이 뭐가 있었더라. 데미안이나 닥터 지바고나 채털리 부인의 사랑(...) 같은 세계명작들? 그것들도 좋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실정과 거리가 생기는 해외문학 말고 사춘기의 한가운데에 있는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감성을 담아낸 국내 창작소설은 거의 없었다. 청소년들의 욕구나 목소리를 담아내는 역할은 오히려 (때맞춰 터졌던) 판타지 소설이나 만화가 담당했다. 강경옥 씨의 [17세의 나레이션]이나 단편만화 같은 것은 정말 심금을 울린다. 중학생이 된 내가 문학소녀에서 만화오덕으로 빠르게 변해간 것은 분명 그러한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출판계도 바뀌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 것은, 창비 청소년 문학 시리즈의 1번 타자인 [우리들의 스캔들]을 읽고 나서다.
손에 잡고선 놓을 수가 없었다.
이모가 교생으로 온다는 소리에 힉껍하는, 반에서 튀는 것을 두려워하는 주인공 보라. 반면 교생들 사이에서 단연 튀는 스타일리쉬표 보라네 이모. 그 이모의 싸이월드를 추적한 누군가가, 반 아이들의 비밀 카페에 이런저런 사진들을 올린다. 이모의 사적인 비밀이 밝혀지고, 학교 안은 시끄러워진다. 이모의 뒤를 캐는 원흉은 누구일까? 그뿐이 아니다. 반 내에 밀고자가 있다. 그건 누구인가? 누군가가 담임이 폭력을 쓰는 장면을 찍어서 카페에 올렸다. 이건 또 누구지? 아이들을 협박해가며 카페의 주인장을 알아내려는 담임. 폭력. 가출. 이모의 반항. 보라의 분노...

학교 문화와 인터넷 문화가 뒤섞이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중학생들 눈높이에 맞춰진 미스테리와 스릴의 이중주.

내가 중학생 때는 반에서 몇 명이 PC통신을 즐기는 정도였다. 비밀 카페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정말 숨쉬듯이 그 문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복닥복닥한 중학생 시절을 거쳤고, 인터넷을 사용하는 유저 중 한 사람이니까. 누가 범인인지 궁금해하고 분노하는 사이에 사건은 클래이맥스를 향해 치달아갔다.
참 오랜만이다. 그 조그만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사건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 시절 내 작은 가슴 안에 담아야 했던 분노가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선생님을 '올려다보는' 학생의 시선. 무기력한 나 자신. 학교 안에 갇힌 학생의 시각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어서 가슴이 아팠다.
보라가 아무리 노력해도 '새빛중학교 동영상'이 검색어 순위에 올라가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리 부조리하게 느껴져도 그 사건들은 사실 '별 것 아닌' 일들이었다. 학교라는 공간 안에서 너무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니까. 어른이 되고 나면 치는 떨릴지언정 '다 그런거지'라고 체념하고 받아들이기 쉬운 사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독자로 하여금 학생의 시선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그 '별 것 아닌' 소동들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사건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이 소설의 힘은 대단하다. 그래. 그 시절엔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제일 중요했고 제일 심각했었다. 누가 밀고를 했는지, 누가 반항을 하는지 그것처럼 신경쓰이는 일이 없었으니까.
보라가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이 너무도 중학생다워서 감탄했다. 중학생다운 치기, 중학생다운 유치함. 하지만, 하필이면 그 추리 과정이 ***인 탓에 난 초장부터 누가 범인인지 눈치채버렸다... orz (범인은 이 반 안에 있는.... 만화 오덕이다!!!)

중학생들의 호흡을 이렇게까지 담아냈다는 데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작가에게도, 이런 기획을 세운 창비에게도 찬사를 보내고 싶다. 이런 책을 앞으로도 많이 만들어내줬으면 좋겠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에도 이런 소설과 만날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대신 강경옥 씨의 작품과 만날 수 있었던 거라면 후회는 하지 않지만.
그간 보낸 시간에 대해서도, 지금 걷고 있는 길에 대해서도.
by 살아가자 | 2008/01/17 00:22 | 올망졸망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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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8/01/17 00:4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강아 at 2008/01/17 11:29
창비가 요즘 여러가지 시도를 많이 하드라구요.. 그러나 창작과 비평이 그렇게 무거워서야..(다르다)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8/01/18 00:03
비공개 ㄷ님 / 정말 반갑습니다! >ㅁ< 혹시 블로그에 새해인사 달아놓은 거 보셨는지요?;;; ㄷㄹㄹ님 너무하세요 ㅠ.ㅠ 제가 찾아갈 수 있는 곳이 없잖아요. 출현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니 천사소녀 네티를 잡으려고 잠복하는 셜록스도 아니고...
자신에게 필요한 상처임을 알아도 역시 아픈 건 아픈 거니까 ^^; 어쩔 수 없이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되고, 지금 당장 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하니까 그것도 쓰라리네요 orz 그래도 계속 버티고 있어요. 버틸 때까지 버텨보려구요.
전 감정이입을 잘하는 것뿐이예요;;; 정말 그것뿐이예요 ;ㅁ;
님도 행복한 밤 보내시길 바래요. 언제나 >ㅁ<

강아 / 응 그러게. 청소년 소설작가층이 워낙에 얇으니까 찾기도 힘든데 역시 노하우인가봐.
....질투난다!!! 질까보냐!!!! ;ㅍ; <-
Commented at 2008/01/18 15:34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8/01/19 01:03
비공개님 / 앗 그러셨다니 저도 감동...
그... 그럼 오프라인에서라도 뵈면 좋겠어요 ;ㅁ;
폰번호라도 비공개로 남겨주시면 연락드리겠다능...

정말 날씨 추운데 몸조심하세요! 전 항상 건강하게 지내고 있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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