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여행을 떠나다「유진과 유진」

네 시간밖에 안 잤는데 아침이 되니 저절로 눈이 떠졌다. 길들인 습관이라는 건 정말 무섭다.
이부자리에서 빠져나오기 싫어서 뒹굴거리다가, 문득 어젯밤 배달된 책들이 머리맡에 놓여있는 걸 깨달았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나」와 「유진과 유진」.
창비에서 나온「우리들의 스캔들」을 읽고 감명이 깊었던 나머지 질러버린 청소년 소설들이다.
더 많은 청소년 소설들을 보고 싶었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나」는 비룡소에서 나왔고, 「유진과 유진」은 푸른책들에서 낸 책이다.
전자는 해외 작가들이 모여서 쓴 전쟁 관련 단편집이고, 후자는 이금이 선생님이 지으신 국내물이다.
전자는 토X이누 때문에 골랐고 후자는 홍보문구에 BL삘을 느껴서 골랐다.
.......
.........................orz 그래..... 내가 선택하는 기준이 이렇지......... 야 임마........ 이금이선생님께 사과해라

작년에 국가폭력이나 전쟁, 사회와 개인의 갈등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지고 닥치는대로 읽고 책장에 몽땅 그런 책으로 가득차게 된 것은 전적으로 토가이누 때문이었다. 이제는 '전쟁'이라는 키워드를 발견하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손이 간다. 청소년 소설 뭐 볼거 없나 검색했을 때,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나」가 끌렸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유진과 유진」은, 일단 제목이 커플링(어디가!!!)이라는 점에 꽂혔는데 뒷표지의 발췌문을 보고 완전히 오해해버렸다.


한 아이는 다른 한 아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 애는 내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아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야, 니가 그 작은유진이가 아니라구?"
그 애는 마치 내가 자기를 몰라보기라도, 또는 시치미를 떼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렇게 자신만만한 걸 보면 혹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무엇이 있는 건 아닐까?



저런 상황에서 두 사람의 시점이 교차하면서 얘기가 진행되는데, 한 사람은 상대를 기억하고 있고 한 사람은 기억못한다는 시츄에이션이 모 장르에서 너무도 고전적인 설정이라 그만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사고가 이행해버렸다. 나도 어디를 어떻게 보면 그렇게 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지금 쪽팔려 죽을 것 같으니까 태클 금지.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이뭐병... 작중에도 나오지만 유진이라는 이름은 한국에서만 사용되는게 아니라서 글로벌한 편인데, 저 유진과 유진이 남자애들인 줄 알았던 것이다. 이게 다 후르츠바스켓 한국판 때문이다. 남탓해서 죄송합니다. BL삘인 줄 알았더니 실은 백합


유진과 유진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여튼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어서 누운 채로 「유진과 유진」을 먼저 집어들었다. 그리고 지금 막 다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멋졌다. 진짜로 멋졌다. 이금이 선생님의 팬이 되기로 했다.
작은유진이가 발코니로 나서는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이 조금 흘렀다.
상대적으로 문체나 상황에서 풋풋한 냄새가 나던(하지만 그 자체가 청소년다워서 나름 매력적이던) 「우리들의 스캔들」과 달리, 정말... 치밀했다. 그리고 가슴이 아렸다.
「우리들의 스캔들」도 그랬는데, 「유진과 유진」도 숨겨진 비밀이 점차 밝혀지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우연히 손에 잡은 청소년 소설 두 권이 모두 이런 미스테리 삘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런 구성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나를 낚기 위해 하나님이 행하신 고도의 낚시일지도 모르겠다(라고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해버리는 것이 나의 단점이다). 그래서 구체적인 전개에 대해서는 쓰지 않으려 한다. 인터넷 서점에서는 태연하게 그 비밀을 정면에서 폭로하고 있으니 우리 모두 지뢰를 조심합시다.

아, 하지만... 뭐랄까.... 자세히 얘기할 수는 없지만 정말, 정말 좋았다. 내가 예상했던 그런 내용이 전-혀 아니었는데도(첫 페이지 펼치고 유진이가 여자애인 걸 깨닫는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덮을 수가 없을만큼 빨려들어갔다. 결국 앉은.. 아니 누운 자리에서 다 봐버렸다.
작가는 성격과 생각이 전혀 다른 두 유진이를 통해서 어리기도 하고 다 자라기도 한, 불안정한 사춘기를 멋지게 그려내고 있다.
나의 중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큰유진과 작은유진, 그리고 소라가 겪었던 경험 같은 것은 하지 않았지만 손에 잡히듯이 그 감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젠 20대이기 때문인지 그 주인공들보다 조금 더 넓게 볼 수가 있었는데 그게 또 너무 재미있었다. 아이들이 귀엽고, 사랑스럽고, 그들에게 연민을 했다. 정동진으로 가는 장면에서는 조금 킥킥거렸다.
괴롭기만 했던 중학시절이었는데, 파헤쳐보면 그 고통 속에서도 이런 빛나는 조각들이 있었던 것일까. 내게도. 깊은 바닷속에서 건져올리는 것처럼 예전의 감성과 기억이 조금씩 조금씩 떠오른다. 때늦은 사춘기를 겪는 것처럼.
소설에서도 아이돌에서도 내 맘 머물 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 결국 슬램덩크와 에반게리온에서 사춘기 감성을 충족했던 그 시절, 끝내 메울 수 없었던 퍼즐의 빈 부분. 슬램덩크의 열정과 에반게리온의 자학에서도 찾아낼 수 없었던 조각을 이제서야 찾아낸 것 같은 기분이다. 작은유진이가 그랬듯이 말이다.
당분간은 청소년 소설 버닝일지도.
친구들 말대로 정말 난 아직도 자라는 중인가봐.... orz

by 살아가자 | 2008/01/20 10:17 | 올망졸망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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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강아 at 2008/01/20 12:13
헉 유진과 유진 저 책... 표지만 보고 뭘까 궁금해 했는데 그런 내용이었다니..(..)
Commented by 별소리 at 2008/01/20 14:33
(라고 항상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해버리는 것이 나의 '장점'이다) ← 이게 맞는 것 아닌가요. 우하하하(도주)
Commented by 우촌 at 2008/01/21 00:17
요즘 살아가자님이 포스팅해주시는 청소년 소설들 덕분에 독서의욕이 불끈불끈 솟고 있습니다ㅜㅜ...
유진과 유진 읽어봐야겠군요 흑흑...정말 만화에 빠져 살다 보니 뭔가 소설을 읽으려고 해도 주인공이 다들 20~30대 어른분들이다 보니 감정이입이 안되는 것에 위험성을 느끼고 있던 요즘이었습니다;;
아차 갑툭튀 죄송합니다..orz...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8/01/22 00:59
강아 / 하핫 그치만 되게 재밌어~ 혹시 볼 생각 있으면 연락 주길. 빌려줄 수도 있으니.

별소리님 / (쫓아간다) 지금 절 놀리시는 거죠오오오오오오 꺄하하하하 거기 서지 못해 마이 베이비~~~

우촌님 / 갑툭튀는 언제나 대환영입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ㅁ<
저도 실은... 좀 그랬습니다 ^^;; 이제 와서 갑자기 왠 청소년 소설? 싶기는 해도 어째 그쪽이 더 재밌게 느껴지는걸요. 어쩌죠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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