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하는 게 말하는 게 아니야 「말해도 말해도」

- 말해도 말해도, 말하는 연습이 끝나질 않아. 마음을 전할 수가 없어.

작년 추석 때였다. 시장조사를 하려고 길을 나서면서 명동 한복판을 걸었다. 추석 당일인데도 길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문득, 이 많은 사람이 모두 직업을 가지고 일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갓 대학을 졸업하고 새내기 사회인이 되었을 무렵, 세상 모든 사람이 힘겨워 보였었다.
꿈을 쫓으며 산다는 것은 힘들다. 이루어질지 어떨지도 모르는 비전을 위해서,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서 지금 눈앞에 주어진 시간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은 참을성 없는 나에겐 가혹한 시련이었다. 하지만 꿈을 포기하고 산다는 게 더 힘들 줄 아니까, 아니 그보다는 ‘이 길 외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조차 모르겠으니까’ 그냥 버틸 수밖에 없었다.


말해도 말해도
사토 다카코 지음, 서혜영 옮김





그렇게 버티고 있을 무렵. 나는 이 책과 만났다.
주인공은 26세의 팔팔한 열혈 (덜렁이) 청년이다. 일본 전통 만담극인 라쿠고가 너무 좋아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라쿠고 스승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며 라쿠고계에 입문한 곤자쿠테이 미쓰바. 8년차의 라쿠고 견습생(그래도 시작할 때보다는 한 단계 높아진 견습생)이다.
긴장하면 말을 더듬는 고질병을 가진 사촌동생 료가, 말을 잘하고 싶다며 라쿠고라도 가르쳐달라고 미쓰바를 조른 것이 시작이었다. 뭐 아주 엉뚱한 소리는 아니다. 라쿠고라는 건 무대에서 나불나불 떠들며 사람을 웃기는 기술이니까. 거기에 성질이 사나워서 손해를 보는 여자와 학교에서 사투리 때문에 왕따를 당하는 꼬마, 말이 서툴러서 야구 해설을 못해 애를 먹는 전직 야구선수가 가세한다.
이 각양각색의 사연을 지닌, 그렇지만 인간관계에 서툴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네 명을 데리고 미쓰바의 라쿠고 교실은 시작되었다.
마음을 꽁꽁 닫은 이들의 커뮤니케이션은 반년 정도 별다른 성과 없이 계속된다. 라쿠고는 늘었을지 모르지만 서툰 인간관계는 변화되지를 않는다. 그러다 엉뚱하게도 문제가 없어 보이던 미쓰바에게서 문제가 발생한다.

미쓰바는 나랑 닮은 데가 있다. 성질이 급한데다 자기 좋아하는 것밖에 못하는 성격도 그렇고, 다른 사람의 멋진 라쿠고를 들으면 경쟁의식도 잊고 마냥 꺼벅 죽어서 헤헤거리는 것도 그렇고, 세계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양 자신감과 열정만 갖고 꿈을 향해 달려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한계에 마주쳐서 코를 찧고 낑낑댄다는 점도 그렇다. 이 소설은 미쓰바가 코를 찧게 되는 그 시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자신감이라는 말에 한순간 가슴속이 찢기는 듯한 날카로운 아픔을 느꼈다.
나는 료에게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했다. 몇 번이나 거듭 말했다. 무책임하게 반복했다. 나는 태어난 이래 할아버지의 물불 안 가리는 지나친 편애 교육 덕인지, 정말이지 나 자신에게 부당한 자신감을 품고 지내왔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손발과 눈코가 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감은 모든 사람이 당연히 갖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할 것조차 없었다. 스물여섯이 되어 일과 사랑에 걸려 넘어지고서야 비로소 근거 없이 철벽처럼 단단하던 자신감이 흔들렸다.
자신감이란 도대체 뭘까.
(본문 중에서)

내가 저랬었다. 난 열정이라는 건 누구나가 다 갖고 있는 건 줄 알았다. 무언가의 팬이 되면 나처럼 버닝하는 건 자연스러운 거라고 생각했다. 일을 하게 되면서,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가서 예전의 열정을 잃어버리고서야 비로소 그게 얼마나 소중한 감정인지를 깨달았다. 그때의 좌절감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
20대란 원래 이런 시기인지도 모르겠다. 꿈을 쫓든 그렇지 않든, 일을 하든 그렇지 않든 그런 건 상관없다. 모두들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내가 만화계의 비전을 걱정하는 것처럼, 미쓰바도 쇠퇴해가는 일본의 전통문화 라쿠고계의 비전을 걱정한다. 내가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게 된 것처럼, 미쓰바도 자신에게 재능이 없는 건 아닐까 망설인다. 그리고 우리들은 함께 슬럼프에 빠졌다.

하지만 미쓰바는, 그제서야 료를 이해하게 된 자신을 발견한다. 좌절했기에 비로소 남을 돌아보고 진짜로 도와주려 할 수 있었다. 인간관계에 실패하고 자기 능력에 회의를 품고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어떤 것. 그 사실은 내게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지금의 좌절이 끝이 아니라 더 큰 도약을 위해 준비된 발판이라고, 작가가 미쓰바라는 선례를 통해서 일러주고 있었으니까. 내가 그 단계까지 왔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의 일이 아닌, 미쓰바라는 타인의 일에 대해서는 손에 잡힐 듯이 그 과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거리를 두고 있는 만큼 미쓰바가 걸어가는 길이 한눈에 보였던 거다.
왕따 소년 무라바야시를 걱정하고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애쓰는 동안, 미쓰바 자신의 문제도 어느샌가 해결되어 버린다. 아니, 해결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세상은 원래 그런 거구나 하고 익숙해져서 조금 자포자기하는 거다. 그렇지만 어깨에서 힘을 빼면 의외로 돌파구가 보였다. 미쓰바도, 무라바야시도, 도카와도 료도 유가와라도 마찬가지였다.

…요렇게 써놓으면 되게 심각한 이야기 같은데, 미쓰바가 워낙에 천하태평에(그것도 나랑 닮았어!! 아악!!) 만담가라서 전개 자체는 가볍고 재미있다. 캐릭터들끼리 치고받는 대사도 귀엽고. 약간 청소년 소설 같은 느낌도 든다.
라쿠고 교실의 학생들이 맞는 결말이 무척 잔잔하게 와 닿았다. 라쿠고 하나를 끝냈다고 한들 현실도 나라는 인간도 확 바뀌지는 않는다. 그저 노력할 뿐이다. 어쨌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 요건 영화판 홍보문구였다.
20대의 꿈, 성장, 커뮤니케이션. 그것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화두라고 생각한다.
인간관계라는 거, 정말 어렵다. 타인이 원하는 말을 꺼내고 맞춰준다는 것은 평생 연습할 수밖에 없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힘들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좀 더 잘 해줄 수 있고, 다정하게 대해줄 수 있다면… 끝까지 연습할 수밖에 없잖앗. 도카와가 그랬던 것처럼.

- 당신과 만나서 정말 다행이에요. 나만이 아니라 모두들 그렇게 생각해요.

한참 힘들 때 이 소설과 만나서 정말 다행이다.
방황하고 있을 20대들에게 가슴으로 가 닿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ps : 작년에 나온 영화판 주연은 쟈니즈 TOKIO의 고쿠분 타이지. 그러나 영화판은 고쿠분 말고 볼게 없었다는 거... 료를 내놧.
ps 2 : 이거 보고선 라쿠고에 흥미가 생겨서 쿠도칸의 드라마 <타이거&드래곤>도 보고 있다. 괜찮아, 미쓰바. 아직 라쿠고계가 망하려면 멀은 거 같애. 힘내라.
by 살아가자 | 2008/01/21 17:15 | 올망졸망 | 트랙백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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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8/01/22 08:17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강아 at 2008/01/22 16:18
20대는 다들 그런걸까... 저번에 모 작가와의 만남 갔는데 작가가 자기는 20대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고.. ㅠㅠ 이것도 재밌겠다.. 체크(..)
Commented by 권순구 at 2008/01/22 19:01
아, 이 책이었군요, 전에 말씀하신던 책이.^^ 방황하는 시절, 함께 힘내도록 합시닷!!!
Commented at 2008/01/28 22:51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8/01/30 12:50
비공개 ㅊ님 / 아잉 님같은 스토커라면 좀 키워도 상관없겠다는.... (탕탕)

강아 / 응 재밌어.
.......사실 이 책에는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지.
우후후후후후후.....

권순구님 / 넵!!!!

비공개 t님 / 이 분 또 절 부끄럽게 하신다....
우왕 굳이 이명으로 들리고 있어요!!!!!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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