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르바비차>를 기억하라
지난 주말에 광화문에서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의 <그르바비차>를 보고 왔다.


내가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귀동냥한 것은 2년 전쯤이었다.
같이 커피숍에서 얘기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우연히 그 얘기가 화제로 올랐는데, 평소 무덤덤한 표정이 트레이드 마크던 친구는 보기 드물게 목소리를 높이며 ‘말이 좋아 강간이었다’라고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했다. 뭘 어떻게 하면 말이 좋아 강간이 될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나는 내막을 물었다.


공산권이 해체되던 1990년대 초, 6개의 국가(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사회주의 이상이 사라지자 언어와 종교, 인정이 다른 5개 나라는 경제와 사회적 권력을 장악해 온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해 각자의 길을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세르비아는 연방의 해체를 허락할 맘이 없었지만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와 마케도니아는 기나긴 전쟁을 통해 결국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세르비아계가 30%나 되는 보스니아는 쉽게 독립할 수 없었다. 이미 보스니아에 오랫동안 정착해서 살아온 세르비아계는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고, 그것은 세르비아로서도 보스니아를 연방에 묶어둘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 정부가 독립을 선포하자, 세르비아 정부군과 민병대는 보스니아 모슬렘을 사살하고 폭행하고 강간했다. 당시의 그곳은 이웃이 이웃을 죽이고 친구가 친구의 동생을 강간하는 아비규환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의 비참함은 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세르비아군은 민간인과 아이마저 무차별 학살하며 타 종교와 문화를 지닌 모슬렘을 이 땅에서 말살하려는 '인종 청소'를 벌였다. 20세기 최악의 전쟁범죄라고 불리는 대학살과 집단 강간이 그것이다. 10만 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했으며, 2만 명이나 되는 모슬렘 여성들이 수용소에 갇혀서 세르비아계 군인들에게 조직적으로 집단 강간을 당했다. 모슬렘의 ‘씨’를 말리고 자신들의 핏줄을 퍼뜨린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들은 태아가 커져서 낙태하지 못할 때까지 임신한 여성들을 수용소에 가둬놓는 치밀함마저 발휘했다.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의 마을 ‘그르바비차’는 그 수용소가 있었던 지역이다.


영화는 현재를 비춘다. 그렇게 강간당해서 짐승의 딸을 품은 에스마는 아이를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단 한 번 젖을 물리기 위해서 아이를 안은 에스마는 ‘아직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남아 있음을’ 아기를 보면서 느꼈다고 고백한다.
에스마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 사라에게 ‘네 아버지는 전쟁 때 죽은 영웅’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사라는 아버지를 동경하면서 ‘나 아빠의 어딜 닮았어?’라고 묻는다. 그 질문에 흠칫 놀라며 사라를 바라보는 에스마. 사랑스런 딸의 얼굴에서 몇 명인지 기억도 안 나는 강간범들의 흔적을 찾게 되는 이 잔인하고 비참한 상황에 대해서 뭐라 말해야 할까.
전쟁은 1995년에 끝났는데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은 사라지질 않는다.

‘사라예보 내 사랑’이라는 노래와 함께 올라가는 영화의 스탭롤을 보면서, 너무나도 치졸한 호기심과 싸구려 동정심으로 전쟁에 흥미를 가지게 된 스스로가 한심해서 눈물이 나왔다. 왜 그게 싸구려냐고? 이렇게 감동받은 척해도, 결국 난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전쟁을 막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게 뻔해서 그렇다. 기껏해야 기부금 좀 내고 위안하는 정도겠지.

그렇지만 같이 영화를 보러 간 친구의 말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분명 세상은 변한다. 2006년 <그르바비차>가 베를린 금곰상을 수상한 이후, 비로소 보스니아는 전쟁 중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에 대한 여론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보스니아 정부는 강간 피해자들을 전쟁피해자로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여기서부터는 내 얘기.

…정말 몰지각한 호기심이었다.
팬으로서, 시스템의 무게를 다뤄내지 못한 이노무 작품이 아까워서 사회적 모순에 집착하고, 전쟁 관련 작품들을 보러 다니고, 주제도 모르고 팬픽에까지 손을 댔다. 어떻게든 이 안타까움을 전하고 싶었다. 이 게임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하지만 나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나로서는 도저히 역부족이었다.

그래도, 언젠가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절망과, 그리고 희망을 예리하게 찔러낼 수 있는 창작자와 만난다면
그런 사람들을 서포트할 수 있는 편집자로 자라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오늘의 이 값싼 호기심이 가치를 얻을 수 있도록… 말이다.


ps : 답글 오늘 내로 달게요 다들 감사 orz
by 살아가자 | 2008/01/30 08:31 | 올망졸망 | 트랙백(1)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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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misha’s Ware.. at 2008/01/30 10:51

제목 : 그르바비차(Grbavica)
감독: 야스밀라 즈바니치(Jasmila ...more

Commented by misha at 2008/01/30 10:50
2006년 PIFF 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그저 망연자실 앉아있던 기억만 납니다. 여기저기서 흐느끼던 소리가 점점 잦아들면서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는 하는데 그 무겁고 무거운 분위기란. 조금 늦은 감은 있지만 이 영화가 다시 국내 관객들을 찾아와서 기쁘기도 하고, 더 이상은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지 않아야 하는데, 란 생각을 하면 또 슬프고. 그렇습니다.
Commented by 사라 at 2008/01/31 01:26
몰지각한 호기심이라 하셨지만... 저는 살자님의 그 호기심 덕분에 저런 사실을 알게되었답니다.'ㅁ'... 그런일이 있었군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네요. 물론 저도 또하나의 몰지각한 호기심이지만... 영화를 한번 봐야겠습니다.
Commented by 시바우치 at 2008/02/04 09:29
뭐...원래 전쟁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요즘 시대라면 대체로 인기있는 대중문화 아니겠습니까. 평화로운 환경에 자라는 젊은이로썬 어쩔 수 없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만 해도 어릴 때의 폭격기, 전쟁이야기 모에가 계속 이어져 학부 때 [전쟁과 미디어]란 강의를 듣고 전쟁물을 접하거나 다룰 때의 개념탑재 및 웬만한 픽션 속 잔혹함은 버틸 수 있게 되어버렸지요; 아이러니한 건, 그 강의에서 가장 끔찍했던 자료는 (주로 책, 영화를 보게 하고 토론, 레포트 제출 식이었음.) 그 어떤 비주얼하고 피비린내나는 영화도 아닌 Johnny Got His Gun이라는 38년도 소설이었습니다. 너무 처참해서 자세한 내용을 블로그에 올리면 읽는 분들의 충격(...)이 감소될까봐 지금까지 못 올리고 있죠. 아무튼 좋게 말하면, 이렇게 이전에는 기피했던 소재나 장르까지 커버범위가 늘어났다는 것이니 문화경험치 상승효과라는 긍정적인 요인도 분명 있습니다. 특히 전쟁영화는 정말 명작이 많지요. DVD로 나온 것 몇편 추천해드릴까요?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8/02/04 12:16
misha님 / 어서 오세요 >_<
트랙백해주신 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영화가 또 눈앞에 떠오르는 것 같더라구요. 국내개봉되어서 참 다행이예요.
리플에서 추천된 [내 원수를 사랑하라]도 샀답니다.

사라님 / 그...그렇게 말씀해주시면... 사라님 감사합니다.

시바우치님 / 저 그 소설 알아요!!;;; 저희 출판사에서 최근에 검토하다가 국내 출판이 기각된 책이거든요. 리뷰 보고선 정말 토할 것 같다고 느꼈는데, 결국 접었더라고요. 이제 와서 이걸 누가 사겠어.. 라는 것이 주된 이유였던 듯합니다만, 말씀들으니 정말 보고 싶군요. orz
Commented by 시바우치 at 2008/02/04 22:56
기...기각!;;; 바로 그 뜨왁스러움 때문에 명작인 책을!!! OTL......
....하긴 출판업 사는 저희 사촌에게 건의해도 절대 통과 안될 책이긴 합니다. 분량도 적당하겠다 번역하라면 할텐데...
저는 예고없이 교수님께 당했다가...주말이 죄다...흑흑흑....
Commented by 살아가자 at 2008/02/05 00:01
;ㅁ; 아니 저희는 잔인함 때문에 접은 건 아니구요.
아무래도... 안 팔릴 거 같잖아요 or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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