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 올망졸망
2008/02/02   중국 문화혁명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붉은 스카프」 [5]
2008/01/30   전쟁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르바비차>를 기억하라 [6]
2008/01/24   실은 다들 불안해서 그러는 거래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 [3]
중국 문화혁명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붉은 스카프」

붉은 스카프
지앙지리 지음, 홍영분 옮김





읽을 만한 청소년 소설을 찾던 중 이 제목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중국의 문화혁명에 대한 이야기라길래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집어들었다. 문화혁명과 홍위병,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왜 그런 일들이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하나도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임철우의 「봄날」을 읽어보기 전까지 518 항쟁을 ‘무고한 사람이 많이 죽은 사건’ 수준으로 알고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그때 「봄날」을 읽으면서 다큐멘터리 소설이 지닌 힘을 톡톡히 실감했고, 이번에 선택한 「붉은 스카프」에서도 비슷한 효과를 기대했다.
그리고 이 책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아침이슬에서 내놓은 두번째 청소년 소설이자 지앙지리의 자전소설인 「붉은 스카프」는 독자를 1966년 문화혁명이 시작되던 그 해, 그 혹독했던 일 년의 정중앙으로 데려다놓는다.

운명적인 1966년이 다가오기 전까지, 나는 공산 소년소녀단임을 알리는 빨간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또한 기쁨으로 터져 버릴 것만 같은 가슴을 안고 매일 무언가를 이루며 성장해 갔다.
그때 나는 열세 살,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리고 그 해에 문화혁명이 시작되었다. (프롤로그에서 발췌)

문화혁명이란 마오쩌둥이 제기한 ‘4대 구악’을 몰아내기 위한 운동으로, 낡은 사상, 문화, 풍속, 습관 등의 사악하고 해로운 영향력을 깨부수어야 한다는 것이 요점이다. 홍위병들은 그를 실천하는 선봉대로서, 마오쩌둥을 추종하는 젊은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언제나 그렇지만, 대의만 들으면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과연 그러했을까?
부르조아 냄새가 난다며 군중들이 ‘대번영 상회’라고 적힌 간판을 깨부순 것이 지리네 마을의 시작이었다. 유행에 걸맞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길을 가다 붙잡혀서 옷을 찢기는 봉변을 당했다. 조금 잘 사는 집은 수색을 당해 값비싼 물건들을 모조리 탈취당했다. 그렇게 털린 집 사람들은 사상을 개조한다는 의미로 허름한 옷을 입고 길거리 청소를 하며 마오쩌둥 대자보 앞에 절을 해야 했다. 홍위병에게 저항하던 할아버지는 땡볕 아래에서 몇 시간이고 빨래판 위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그를 본 옆집 할머니는 충격에 자살을 택하지만, 그 할머니의 가족들은 슬퍼하는 티조차 낼 수 없었다. 자살은 사상 불순자나 하는 것이며, 그를 동정하는 것 또한 사상 불순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들이 시내 곳곳에서 일어난다. 강제로 청소에 동원되다 길에 쓰러진 자기 어머니를 못 본 척 지나치는 아들은 공식적으로 어머니를 비난하고 연을 끊는다는 대자보를 썼다. 어느 홍위병 여학생은 길거리에 묶여 처벌받던 어머니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었다. 학생들은 자기를 가르치던 선생들이 실은 서양 사상에 취해 있었으며, 자신들에게 그를 강제로 주입시키려 했다고 비난하고 고발했다. 당연히 고발 대상이 된 선생들은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그 와중에 자신의 할아버지가,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할아버지가 옛날 지주였다는 걸 알게 된 주인공 지리는 큰 충격을 받는다. 전교 학생회장이며 선생님을 대신해 아이들을 가르칠 만큼 똑똑했던 지리는 이제 반동분자로 낙인찍히고, 평소 자신을 시기했던 아이들에 의해서 비난받고 괴롭힘을 당한다. 정말로 할아버지는 악마 같은 지주였으며,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는 반동 우익인가? 지리는 그 사실에 괴로워하고 힘들어한다.

여기서 기가 막히는 사실은, 지리가 한번도, 단 한번도 이 ‘문화혁명’이라는 것에 반감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리는 아버지가 우익 반동인지 아닌지를 의심하기만 했지, 마오쩌둥이 잘못하고 있다는 의혹 따위는 추호도 품지 않는다. 마오쩌둥도, 문화혁명도 무조건 옳은 것이다. 자신이 지주 집안의 딸이라는 사실이 어찌나 괴로웠던지, 지리는 경찰서에 가서 자신의 성을 바꾸려고까지 한다. 경찰은 그런 지리를 반갑게 맞는다. ‘그래, 네 출신성분이 어떻든, 그런 관계를 끊어버리고 마오쩌둥님께 충성만 맹세하면 넌 우등시민이 될 수 있단다!’
* 이 전개는 가X낙스나 클X프의 막장계열 픽션이 아니며, 역사에 기반한 자전소설의 내용임을 재차 알려드립니다. 

이 문화혁명의 가장 무섭고 두렵고 끔찍한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심으로 사랑하던 가족끼리도 서로를 고발하고 연을 끊는 판에 누구를 믿고 의지할 수 있을까? 아무리 아버지를 존경해도, 그 아버지가 마오쩌둥에게 반하는 행동이나 말을 했다면 용서없이 고발해야 한다는 지리의 신념. 어린 학생들은 그렇다치고 학교 선생님들마저, 그렇게 학생들에게 당하고 홍위병에게 수모를 겪으면서도 ‘마오쩌둥은 옳다. 지금 내가 당하는 것은 행정상의 착오 때문이다’라고 생각했으니 정말 말 다했다.

이 소설의 끝나는 지점은 그래서 슬프고 가슴 아프다. 문화혁명은 1966년부터 마오쩌둥이 사망할 때까지 10년이나 지속되었다. 따라서 소설의 결말에 이르러서도 이 모든 미친 행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 작품의 엔딩은 그런 것이 아니다.
「붉은 스카프」의 마지막 장에서, 지리는 ‘도저히 내 가족을 버릴 수는 없다. 온 힘을 다해 지키겠다’라고 처음으로 결의한다. 콕 찍어 비교하지는 않았지만, 그 말은 즉 마오쩌둥이 아니라고 해도 가족을 선택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어찌나 가슴이 아리던지. 솔직히 보면서 지리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버지를 배신하지는 않을까 내내 가슴을 졸였다. 거의 그럴 뻔한 순간도 많았고.

이런 시대를 겪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할 수 있음을, 정치가가 변덕 좀 부렸다간 자신이 믿던 모든 이들이 자신을 비난하고 돌아서고 매질할 수 있다는 것을 겪어본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 사회에서 발붙이고 숨쉴 수 있을까? 그런 거대한 상처를 안고서도.
사람의 신념이란, 뭔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일까. 이 땅에 하나의 개인으로 태어난 이상, 접할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어느 정도 가공되고 왜곡된 사실들이다. 일본 만화에서 흔히 나오는 공상과학적인 세뇌 플레이 따위 하지 않아도, 사람은ㅡ 아니 사람들은 얼마든지 정보를 통해 세뇌될 수 있다. 이런 생지옥을 낳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이런 걸 접할 때면, 이제 국가 폭력에 대한 책은 그만 좀 봤으면 좋겠다고 절로 바라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음 책을 찾고야 마는 것은 이미 관성이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도 뭔가 더 알아내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인가.
그 바람이 뭔가를 바꿀 수 있을까?


ps : 북한 어쩔겨...

by 살아가자 | 2008/02/02 18:20 | 올망졸망 | 트랙백 | 덧글(5)
전쟁의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르바비차>를 기억하라
지난 주말에 광화문에서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의 <그르바비차>를 보고 왔다.


내가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귀동냥한 것은 2년 전쯤이었다.
같이 커피숍에서 얘기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우연히 그 얘기가 화제로 올랐는데, 평소 무덤덤한 표정이 트레이드 마크던 친구는 보기 드물게 목소리를 높이며 ‘말이 좋아 강간이었다’라고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했다. 뭘 어떻게 하면 말이 좋아 강간이 될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나는 내막을 물었다.


공산권이 해체되던 1990년대 초, 6개의 국가(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로 구성된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사회주의 이상이 사라지자 언어와 종교, 인정이 다른 5개 나라는 경제와 사회적 권력을 장악해 온 세르비아로부터 독립해 각자의 길을 가기를 원했던 것이다. 세르비아는 연방의 해체를 허락할 맘이 없었지만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와 마케도니아는 기나긴 전쟁을 통해 결국 독립을 쟁취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세르비아계가 30%나 되는 보스니아는 쉽게 독립할 수 없었다. 이미 보스니아에 오랫동안 정착해서 살아온 세르비아계는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고, 그것은 세르비아로서도 보스니아를 연방에 묶어둘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스니아 정부가 독립을 선포하자, 세르비아 정부군과 민병대는 보스니아 모슬렘을 사살하고 폭행하고 강간했다. 당시의 그곳은 이웃이 이웃을 죽이고 친구가 친구의 동생을 강간하는 아비규환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의 비참함은 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세르비아군은 민간인과 아이마저 무차별 학살하며 타 종교와 문화를 지닌 모슬렘을 이 땅에서 말살하려는 '인종 청소'를 벌였다. 20세기 최악의 전쟁범죄라고 불리는 대학살과 집단 강간이 그것이다. 10만 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했으며, 2만 명이나 되는 모슬렘 여성들이 수용소에 갇혀서 세르비아계 군인들에게 조직적으로 집단 강간을 당했다. 모슬렘의 ‘씨’를 말리고 자신들의 핏줄을 퍼뜨린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들은 태아가 커져서 낙태하지 못할 때까지 임신한 여성들을 수용소에 가둬놓는 치밀함마저 발휘했다.

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의 마을 ‘그르바비차’는 그 수용소가 있었던 지역이다.


영화는 현재를 비춘다. 그렇게 강간당해서 짐승의 딸을 품은 에스마는 아이를 버리려고 했다. 하지만, 단 한 번 젖을 물리기 위해서 아이를 안은 에스마는 ‘아직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남아 있음을’ 아기를 보면서 느꼈다고 고백한다.
에스마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 사라에게 ‘네 아버지는 전쟁 때 죽은 영웅’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사라는 아버지를 동경하면서 ‘나 아빠의 어딜 닮았어?’라고 묻는다. 그 질문에 흠칫 놀라며 사라를 바라보는 에스마. 사랑스런 딸의 얼굴에서 몇 명인지 기억도 안 나는 강간범들의 흔적을 찾게 되는 이 잔인하고 비참한 상황에 대해서 뭐라 말해야 할까.
전쟁은 1995년에 끝났는데도 살아남은 사람들의 고통은 사라지질 않는다.

‘사라예보 내 사랑’이라는 노래와 함께 올라가는 영화의 스탭롤을 보면서, 너무나도 치졸한 호기심과 싸구려 동정심으로 전쟁에 흥미를 가지게 된 스스로가 한심해서 눈물이 나왔다. 왜 그게 싸구려냐고? 이렇게 감동받은 척해도, 결국 난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해서, 전쟁을 막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게 뻔해서 그렇다. 기껏해야 기부금 좀 내고 위안하는 정도겠지.

그렇지만 같이 영화를 보러 간 친구의 말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분명 세상은 변한다. 2006년 <그르바비차>가 베를린 금곰상을 수상한 이후, 비로소 보스니아는 전쟁 중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에 대한 여론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보스니아 정부는 강간 피해자들을 전쟁피해자로 인정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요기서부터는 개인적 잡담
by 살아가자 | 2008/01/30 08:31 | 올망졸망 | 트랙백(1) | 덧글(6)
실은 다들 불안해서 그러는 거래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
한중일 인터넷 세대가 서로 미워하는 진짜 이유
다카하라 모토아키 지음, 정호석 옮김




0. 오늘 소개할 서적은 아시아 3국의 젊은 세대들이 표출하는, 서로에 대한 증오가 어디서 비롯되는지 그 본질을 탐구한 사회학 책입니다. 회사 벽에 붙은 추천도서 포스터에서 발견하고 샀는데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책 소개는 1, 2장에 실린 '일본 청년들의 혐한 내셔널리즘에 대한 분석' 요약정리글로 대신하겠습니다.

1. 일본은 고도성장기에 탈공업화로 변화되는 진통을 일본 특유의 회사주의(종신고용제로 대표되는)로 빨리 극복할 수 있었다.

2. 급속한 성장은 국민 모두에게 풍족함을 부여했고, 때문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재벌 비리가 판쳤던 한국처럼 소득 재분배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때문에 '전쟁에 대한 책임' '참 민주주의 실현'과 같은 추상적인 문구를 외치던 좌파들은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사라져갔다.(한국은 일본과 달리 바로 눈앞에 '독재정치'라는 뚜렷한 타깃이 있었기에 좌파들이 호응을 얻었다)

3. 그러나 사회유동화 시대, 즉 더 이상 보장된 직장을 찾을 수 없고 일자리 역시 업무자동화에 따라 줄어드는 현 시점에 이르자, 이미 자리를 꿰차고 앉아 놓지 않는 단카이 세대와 정사원이 되지 못하고 프리타(비정규직 하층 노동자, 하루벌이 직종)로 살아가는 청년 세대로 양분화되었다.

4. 즉, '회사 내 사람을 최대한 보호하는' 일본 회사의 전통이 아버지격인 단카이 세대들에게는 적용되었으나, 아직 취직하지 못한 자식뻘의 청년들은 그들이 보호받는 만큼 밀려나는, 하층 노동자의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미국의 경우 일본 청년들의 역할을 이민 노동자들이 대신하고 있다)

5. 게다가 단카이 세대들은 이것들이 청년들의 태도가 나약해서 생기는 문제라고 비판했고(패러사이트 싱글-부모에 기생하는 독신자 라는 단어가 그 주장을 대변함) 청년들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 소비문화로 빠져들었다. 오타쿠가 대표적인 갈래 중 하나. 그러나 실제로는 회사의 보호 속에 무능해진 아버지 세대나 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밀려나버린 자식 세대 양쪽 다 개발주의의 피해자이다.

6. 일찌기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을 외쳤던 좌익이 지지받지 못하고 소멸한 것은 '엘리트가 나라를 풍요롭게 만들겠다'라는 약속이 엘리트와 국민 쌍방에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이 배반당하자 청년들의 분노는 '보이는 적'을 원했고, 그 반동 중 하나가 중국위험론(저놈들 때문에 우리나라 경제가 안되는 거야)을 등에 업은 혐한과 혐중이다.

7. 즉 일본의 인터넷 여론은 확실히 우경화되고 있으나, 그것은 타국 통치 시절을 그리워하는 내셔널리즘이라기보다는 젊은 세대의 불안이 표출되는 형태의 하나라는 것.

8. 제가 이해를 잘못한 채 요약한 곳이 있을까봐 두렵네요. 이런 건 씨네필님이 잘하시는데...

9. 한국에 대한 분석도 상당히 정확해서 놀랐습니다. 중국은 잘 모르겠어서 코멘트 불가... 중국 근대사를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0. 독서란 즐겁군요. 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듯한 기분.

by 살아가자 | 2008/01/24 01:58 | 올망졸망 | 트랙백 | 덧글(3)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


rss

skin by 이글루스